밤조림에 스며든 계절의 향기
단풍이 스며드는 가을이 오면 집에 밤이 한가득 생긴다. 1년 중 가장 크고 알찬 밤이 나오는 시기, 바로 지금이다. 유독 커다란 밤을 볼 때면 가을이 왔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때부터 나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너무도 통통한 이 밤을 그냥 둘 수 없기에.
그대로 두면 냉동실로 직행해야 하는 밤이 아까워 신랑을 부른다. 그때부터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를 껍질 까기에 돌입한다. 2~3시간 동안 밤 껍질만 까다 보면 손가락이 펴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드디어 1차 완료! 다른 음식보다 유독 밤조림을 만드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가을의 설렘이 잘 느껴진다. 물론 힘든 것도 아주 잘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렇게 1차 완료된 밤은 베이킹 소다를 넣은 물에 담가 하루 꼬박 불린다. 다음날 아침,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밤부터 확인하러 간다. 밤 껍질색이 잘 우러나와 짙은 갈색의 물로 변한 걸 확인하면 그대로 냄비 속에 풍덩. 2~3번에 걸쳐 팔팔 끓이고 깨끗이 헹궈주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밤 여러 개 부서져서 배불리 먹었지.
자, 지금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바로 굵게 자리 잡은 밤 심지 빼기. 콕 박혀서 나오지 않는 밤의 굵은 심지를 이쑤시개로 쏙 빼면 그리 개운할 수가 없다. 이 재미를 혼자서 느낄 순 없기에 또다시 신랑을 부른다. 밤을 헹궈내면서 여러 개 망쳤을 땐 언제고 신랑이 심지를 빼다 밤을 부수면 나의 잔소리 폭격은 시작된다. 그 또한 배불리 입에 넣어주면 될 것을.
반들반들 깨끗이 손질된 밤에 단맛을 더 추가할 타이밍이다. 너무 단 것은 좋아하지 않기에 일반 설탕 대신 풍미가 가득한 머스코바도 설탕을 사용한다. 용량을 조금 줄여 설탕을 붓고 드디어 조리기 시작. 물이 자작하게 다 졸여졌을 때쯤 소금 한 꼬집과 와인 소량을 넣으면 맛은 더 살아나게 된다. 끈적한 단물이 입혀진 밤조림이 완성되면 하나를 집어 입속으로 넣는다. 순간적으로 오는 행복감이 이렇게 큰 건 밤조림이 최고지 않을까.
매년 만드는 밤조림은 유명한 한 영화 속 장면을 보고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엔 매일같이 베이킹에 빠져있었기에 밤식빵을 위해서라도 밤조림이 꼭 필요했다. 그 많던 밤은 둘로 나뉘어 하나는 밤조림으로 나머지는 밤 잼으로 재탄생한다. 육아스트레스로 가득 차기 직전 냉장고를 열어 밤조림 한 알을 꺼내 입 안 가득 넣고 씹으면 화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매년 밤과 함께 가을을 온몸 가득 느끼고 있었다.
요리를 즐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계절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요리는 매년 해도 즐거움은 그대로다. 사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 가을에 만들어두는 밤조림만 한 건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