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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로로가 그렇게 무서워?

최대 10배 강렬한 공포, 놀람, 분노, 슬픔, 기쁨

by 로미




공포


나는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직접 유치원으로 아이를 데리러 간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 그리고 아이보다 먼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기는 선생님.

'견학을 다녀와 행복한 하루를 보냈겠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어머니 오늘 견학 갔다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뽀로로 영화를 봤는데, 주원이가 무섭다고 많이 울었어요.

버스에서는 안전벨트를 풀거나 이동할 수가 없어서 우는 주원이를 많이 위로해주지 못했어요. 많이 무서워했는데 가정에서도 한번 잘 살펴봐주세요."



아- 그런 일이. 한두 번 듣는 이야기도 아닌데 속으로 또 헉하고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주원이가 전보다 많이 무뎌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 어린이집 2년, 유치원 2년 차 짬밥 다 어디 갔니.



머릿속으론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무수한 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매달 하는 어린이집 연극 공연에 벌벌 떨며 기겁을 해서 선생님과 복도에서 따로 놀았단 이야기.

외부로 나가는 유치원 공연 행사에 선생님 옆자리를 차지하고도 내내 긴장해 있었다는 이야기.

어렵게 잡은 영어 클래스에 다른 아이들은 모두 신나 하는데 주원이만 기겁을 하고 울어대서 시작도 못하고 나왔던 이야기



아주 사소한 것부터 큰 사건들까지. 엄마인 나는 너무도 잘 알지.

그래도 이제 조금은 나아진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다른 것도 아니고 이렇게 뽀로로에 처참히 무너졌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도 한방에 와르르 무너졌다.



공포에 대한 주원이의 마음엔 언제 굳은살이 생겨줄는지.

늘 내 생각보다 느린 주원이의 성장 속도에 나는 오늘도 마음속에서 요란한 파도가 일렁일렁.

반짝이는 윤슬이 내비치던 바다가 한순간 강렬한 구름이 몰고 온 어두운 비바다로 치닫는다.



그래도 나는 엄마야. 중심을 잃지 말아야지. 지금 여기서 제일 힘든 건 오늘도 크느라, 부딪히느라 노력한 너지. 그래, 주원이는 분명 점점 나아지고 있어. 나는 내 아이를 믿는다.

다행이다. 그저 내 마음을 고쳐먹으니 다시 마음속에 한줄기 빛이 내리쬔다. 그래. 곧 무지개도 생기겠지.



그날 나는 고민만 여러 번 하다 어떤 말도 먼저 건네지 못했다.

"엄마, 오늘 뽀로로에 나오는 상어가 너무 무서웠어요. 자려고 누웠더니 아까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나요."

그렇게 아이는 무서웠던 상어의 기억을 먼저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상어는 며칠 동안 아이의 머릿속을 맴돌며 아이에게 무시무시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뽀로로를 무서워하는 내 아이는 6살이다.






슬픔

방학의 행복에 대해 지저귀던 주원이는 개학날 아침 눈을 뜨기도 전에 이야기를 한다.

"엄마, 오늘이 개학날이라 너무 슬퍼요. 유치원 가기 싫어요."

'하- 눈뜨기도 전에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아이의 특성을 아는 이제는 어느 정도 내 마음이 평화롭다.



평소에도 내 속이 부글거린다고 아이의 심정을 읊어주지 않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오늘 단단히 마음먹었다. 지속되는 아이의 떼씀에도 결코 지치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또르르-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주원이.

그 모습을 본 나는 그저 안아주었고, 나 같아도 오랜만에 유치원엘가니 가기 싫은 마음이겠다고-

차분히 마음을 읽어주었다.



조용히 눈물을 계속 훔치는 듯하더니. 이내 웃으며 "그래도 우리 유치원 노는 유치원이잖아~" 하는 모습에 놀랐다. 개학날 아침을 전쟁통속에 등원시키고는 착잡한 마음에 하루를 후회하며 보낼까 봐 큰 다짐을 한 난데. 이렇게 나오다니. 삐- 반칙이다.



그리고 난 그날따라 유독 슬펐다. 주원이의 의젓함이 나의 가슴에 박혔다. 찌릿했다.

그동안 너의 슬픈 감정의 깊이가 깊은 걸 난 왜 그저 떼쓰는 것으로 치부했을까.







영재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감수성이 무척 발달한다고 한다. 감각이 예민한 것처럼 그저 하나의 특성이다. 공포심이 훨씬 높고, 분노나 놀람에 대한 인식도 훨씬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고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으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는 그런 의심을 해본 적이 별로 없는 나였다. 그런데 슬픔의 깊이나 강도가 최소 5배에서 10배 강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참 많은 반성을 했다. 그동안 주원이 수준에 하나도 못 맞춘 건 나였다.



공포감에 패닉상태에 빠져 눈에 보일 정도로 벌벌 떠는 아이를 보면서 '진짜 무서운가 보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건넨 위로는 고작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정도였다. 어쩌면 난 진정 주원이의 무서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일지도. 주원이의 슬픔을 반도 못 읽은 것일지도.



영재아 관련 서적들을 읽으며 순간 유난히 공포 영화를 못 보던 내 어린 시절이 스쳤다. 그리고 그때의 나와 마주했다. 어른이 된 내가 다시 만난 그 시절의 나. 혼자만 유달랐던 나. 그때 나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공포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더 찬찬히 그런 순간들을 들여다본다. 이번엔 그 시절의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사랑하는 내 아이 주원이를 위해.



만화 영화를 무서워하는. 책을 보며 무서워하는. 헤어짐에 깊은 슬픔을 느끼고. 보통의 아이보다 훨씬 많은 떼씀을 보이는.

우리 주원이를 떠올린다. 그리고 짐작해 본다.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불쑥 찾아오는 그 다양한 감정들의 깊이에 대해. 이제 꾸준히 생각한다. 그리고 꾸준히 마주한다.

뽀로로가 안 무서워질 만큼의 마음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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