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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부유함

가난, 그거 별거 아니더라.

by NINA

15년 전 나는 1년여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단돈 2700만원을 들고 집을 나왔다.
3500만원짜리 셋방을 얻으려면 800만원이 모자랐다. 대출을 받았다.

월급의 대부분을 대출 갚는 데 넣으며 살았다.
대출이 다 갚아지면 또 다른 대출을 받으며 집을 조금씩 넓혀갔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며 내게도 드디어 ‘집’이라는 것이 생겼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 수 있었던 건,

가난한 생활이 내게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아빠가 사업을 시작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두 살 터울 오빠는 대학에 가야 했고,

엄마는 오빠 등록금이 필요했다.

엄마는 아주 미안한 얼굴로 내 피아노를 팔자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꼭 다음에 다시 사줄게.”


두 해 뒤, 아빠 사업은 결국 망했다.
내가 수능을 보던 무렵이었다.

엄마는 “집에 오지 마라”고 했다.

빚쟁이들이 드나들며 집안이 어수선하니

내가 공부에 집중 못할까 걱정했던 거다.


나는 학교 앞 독서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고, 친구 집에서 씻고,

문방구에서 파는 왕만두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학교 앞에는 헌혈의 집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헌혈이 취미였다.

전혈은 한달에 한 번, 혈장헌혈은 2주에 한 번.

초코파이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누군가를 돕는 기분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사실 초코파이 먹으러 갔다가 봉사까지 한 느낌ㅎㅎ


그러다 어느 날,

독서실 휴게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한쪽 벽면 거울 속에서 낯선 내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

'아, 나도 쓰러지는구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신을 잃은 나를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쉽기도 했다.

워낙 튼튼해서 제대로 아픈 적이 없던 나는

이 현장의 증인이 고팠다.

그리고 이내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김니나 살만하구만ㅎㅎ'


수능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와 아빠는 없고 오빠만 있었다.
잠시 후 빚쟁이들이 들이닥쳤고,

우리는 문을 잠근 채 조용히 버텼다.

그들이 돌아가자 오빠는 욕을 했다.
나는 그런 오빠의 모습을 처음 봤다.

오빠는 늘 조용하고 차분했다.

내가 놀랐을까봐 센 척을 했던 걸까.

암튼 나는 오빠와 함께라서 아무렇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갑자기 짐을 싸라고 했다.
우리는 부산의 허름한 판잣집,

수세식 화장실 하나 달린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대학 원서를 썼다.
합격 통지서를 받자,

아무 말 없이 서울에 올라왔다.

그리고 학교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등록금 좀 붙여줘라.”


엄마는 놀라며 말했다.
“겁도 없다, 너.”


그러면서도 등록금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렇게 타지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보증금을 낼 돈이 없어 15만 원짜리 고시원에 살았다.

그마저 부담이 될 땐 친구와 좁은 고시원방을 함께 썼다.

침대를 뺀 방에서 작은 여자둘은 충분히 누울 수 있었다.

날씬이들ㅎㅎ


수업이 끝나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다 했다.
레코드 가게, 호프집 새벽 알바, 마트 시식 알바.


알바는 좋은 기억이었다.

매달 받는 월급, 나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즐거움.

기특하다며 책 사보라며 일이만원을 손에 쥐어주던 할아버지 손님들.

내 몫을 하며 예쁨도 받는 느낌은 힘듦보다 신남에 가까웠다.


그래도 엄마는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반나절 버스를 타야 겨우 올 수 있는 곳에 딸래미를 혼자 보내놓고 단 한번도 들리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려서 무리를 했던 거 같다.


나는 엄마의 그 마음을 알기에 돈 천원도 쉽게 쓰지 못했다.

3500원짜리 학식조차 사치였다.
그런 곳에 돈을 쓰지 않더라도

고시원에서 주는 쌀밥과 김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미루던 통장을 정리하려 은행ATM기기 앞에 섰다.


드드득 드드득.

ATM기기는 통장가득 엄마의 이름과 숫자를 찍어서 나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통증을 느끼며

처음으로 소리내어 끄억끄억 울었다.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엄마의 시간들이 한번에 밀려왔다.


서울로 혼자 올라와 등록금을 달라며 전화했을 때,

엄마는 정말 그 돈을 어디서 만들어 보낸 걸까.

쥐가 천장을 뛰어다니고,

허허벌판 판잣집에서 벌레와 씨름하며 살던 엄마였다.


지금 나는 무럭무럭 자라서

월급의 일부를 엄마에게 보내며 산다.
떵떵거리는 건 아니지만, 부족함 없는 편안한 삶이다.


누구보다 가난할 지 모르지만

또 누구보다 부유하다.

갖고 싶은 거보다 감사한 것이 더 많은 삶이기에.


20대의 나는 아주 가난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가난, 그거 별거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 조금 없음에 아쉬워하지도 말고

누군가의 부족함에 안타까워하지도 말기를.


그저 오늘을 잘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부자라는 걸 알 수 있기를.


삐뚤빼뚤해 보였던 내 길이

결국 나를 부자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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