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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Oct 13. 2024

그녀에게

01. 신이 건네는 조크.

따뜻한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녀에게 무릎 담요를 덮어 준 뒤,

이마에 뽀뽀를 해준다. 그러면, 그녀는 졸린 눈을 희미하게 뜨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녀의 눈두덩이 속에서 번쩍하고 잠깐 빛났다 사라지는 새까만 눈동자가 순간, 나를 과거로 돌려놓는다.

마치, 시계태엽이 감기듯.

                          


  '세상이 무너진다'라는 감정을  태어나, 첨 알게 된 날.


발목 아래로 나폴 거리는 치맛자락을 끌며, 그녀는 도망가는 중이다.

때마침, 그녀의 슬리퍼 한 짝이 벗겨져 '휙'하고 날아와, 내 정수리를 정확하게 '콩'하고 때렸다.

분명, 신발짝은 '콩'하고 내 정수리를 때렸는데,

내 마음은 '쩍'하고 찢어지고,

내내, 참았던 울음이 목구멍 너머로, 삐죽이 삐져나와

결국, 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며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발 한 짝을 가슴에 안은 채.

하지만, 키가 그녀 반토막도 안 되는 내 뜀박질로는 도저히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 봤자였다.


이윽고, 그녀 앞에 멈추는 버스.

'끼익'하고 문이 열리자, 그제야 이쪽을 휙 하고 돌아보는 그녀의 눈 언저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젖 먹던 힘을 다해, 쫓아가는 내가 그 자리에 우두망찰 멈춘 순간이다.

그녀는 나를 보며, 무어라고 소리치지만,

귓밥으로 꽉 막힌 듯한 내 귓구멍 속으로 그녀의 그 어떤 말도 들어와 앉질 못했다.

단지, 그녀의 시퍼런 멍이 '따라오지 마'라고 내게 외치는 것 같았다.

'붕~' 그녀를 집어삼킨 버스가 내 얼굴에다가 콧방귀라도 뀌듯, 새카맣고 맛없는 매연을 내뿜으며 떠났다.

"엄마.... 엄마..."

심심하면 이어졌던, 아버지의 폭행이 그녀를 신발 한 짝만 신고 도망치게 한 날,

그날.. 내 작은 세상도 무너져 내렸다.                            


 배너 박사가 가슴팍을 찢고, 헐크가 되듯.


'엄마... 아빠가 죽었어'

그녀는 세 딸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볼 뿐 별 시답지 않은 일이란 듯, 행주로 식탁만 훔쳐댔다.

그녀도 원치 않았고, 아버지의 장례식장엔 아버지의 연인이 오기로 했기에,

우리도 그녀를 이혼한 전 남편 장례식장(그것도, 차로 왕복 10시간이 넘는 거리)까지 굳이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아빠.. 저승 가기 전에 엄마한테 들려서 미안했다. 사과 한마디 하고 가"

큰 딸의 부탁 아닌 협박에도 아버지는 끝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간 모양이었다.

그녀가 통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데리고 김해로 내려갔다.

그래도 자식들 낳고 산 세월이 있으니. 마침표던 느낌표던 물음표던 뭐든 그녀도 긴 세월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 같았기에.  

전 남편의 유골함 앞에 선 그녀는 울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그저 멍한 눈빛으로 "좋은 자리에 누웠네"만 중얼거렸다.

그러다, 막내딸이 "아빠.."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짐짓, 놀란듯한 그녀가 막내딸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토해냈다.

막내딸이 안쓰러워서인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안쓰러워 서인지..

나는 여하튼, 이렇게라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즈음. 작은 일에도 몹시 흥분하고 화를 냈던 그녀를 달래기 위해,

우리는 쇼핑몰에 들러 그녀가 원하는 옷을 몇 벌 안기고 나오는 참이었다.

아무리 변했어도 우리가 어린 시절 숱하게 오가던 그 거리는 옛날 그대로였다.

'요가 오데고?'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묻는다.

"엄마 김해잖아."

"집에 갈란다. 김해서 서울까지 지하철 타고 갈 수 있제?!"


순간, 엄마 키의 반토막도 안 되던 내가, 도망치며 벗겨진 엄마의 신발 한 짝을 '콩'하고 맞았던

그 시절 그 골목으로 되돌아가 서 있었다.

분명, 그때는 내 마음이, 내 작은 세상이 무너져 내렸었는데..


"엄마 농담이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왔잖아 우리. 하하하 웃긴다. 진짜 "

그때, 그녀가 큰 병원에서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직후였으므로,

짐짓, 나는 아무 일도 아니란 듯,

그녀의 손 위에 내 손을 조용히 포개어 얹었다.

그러자,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나와, 김해 거리를 번갈아 보며 의아해했다.


배너 박사가 가슴팍을 찢고, 헐크가 되듯.

그렇게, 울기만 했던 어린 꼬마도 순간 가슴팍을 찢고, 어른이 되어, 

그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신이 건네는 조크에도 이제는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엿 먹어'를 

날릴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음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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