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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Oct 13. 2024

그녀에게

02. 천만다행이다.

요즘 그녀가 입버릇 처럼 하는 말이 있다.

  "천만다행이다. "

머리를 감겨 드릴 때에도, 밥을 떠먹여 드릴 때에도, 

같이 널브러져 앉아 시간을 때우며, 과자를 먹을 때에도. 

그녀는 앵무새처럼 늘 똑같은 말을 한다


"딸아 니가 있어서 천. 만. 다. 행이다"

그녀는 기억을 못 한다. 

아니, 굳이 꺼내어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 진짜 천만다행인 일이 언제 일어났었는지.


고래만 한 멸치가 유영하던 김치국밥


늘 그랬듯.

그녀가 없는 집은 한바탕 강도가 센 지진이 쓸고 간 뒤처럼 엉망진창이었고,

슬픔이 침전된 채,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그런 날이면 난 언니의 새끼손가락을 내 작은 다섯 손가락으로 있는 힘껏 꽉!! 움켜쥐었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니가 나 좀 지켜줘 봐 ' 뭐 이런 뜻이었을 게다.

시커먼 아부지는 마치 자신이 피해자라도 되는 양, 불같이 성질을 부려가며.

죽지 못해 김치국밥을 끓였다.

시커먼 아부지가 끓인, 새빨간 김치 국물 위로 유영하듯 둥둥 떠다니는 고래만 한 멸치가 나는 너무 싫었다.

그래서 한 숟가락도 입에 대지 않았다.

시커먼 아부지는 눈을 부라리며 밥을 먹으라고 내게 화를 냈다.  

곧, 무쇠 같은 그 주먹으로 그녀에게 그랬듯, 

나도 때릴 것만 같아서 나는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너무 무서워서,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한 셈이다.


그런 내 손을 잡아끌고, 마을회관 뒷골목으로 간 사람은 다름 아닌 언니였다.

겨우, 나보다 세 살 위였던.

그곳은 언니와 나만 아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는데,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이 흐르는 데다가 

낮이고 밤이고, 캄캄해서 동네 아이들은 절대 오지 않았다.

 "이거 묵어봐.배고프제"

꽝꽝 얼린 야쿠르트(아이스크림 마냥) 한 병을 내 입에 물려주고선,

언니는 내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자기는 시커먼 아부지가 해준 김치국밥을 많이 먹어서 배부르다고 했다.

나는 그때 언니의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던 거 같다.  


우리는 그렇게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야쿠르트를 다 먹고서야 집으로 가려고 손을 잡고 나왔다. 

그러다가 양쪽 신발을 다 신고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한쪽 신발만 신고 도망갔던)를 봤다.

'우리 잊고, 엄마 삶을 살지. 왜 돌아왔어?!'

가슴속에 '헐크'가 도사리는 지금의 나였음, 이렇게 소리치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멀리 나비처럼 훨훨 날아 도망가라고.

돌아보지도 말라고.


하지만, 그때의 난 그녀의 키의 반토막이었으므로. 겨우 뱉어낸 말이

"천만다행이다. 엄마"였다.


바다의 깊이를 모르는 지친 나비가 내 품에 안기던 날.


'딩동'

초췌한 모습으로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한, 얼굴로 그녀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이 도둑년아 니가 내 돈 훔쳐가고 편하게 살 줄 알았나?"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그녀가 나를 몰아세웠는지, 지금은 까무룩 기억에 없다.

하지만, 밤마다 그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악몽을 꿨었던 건 뚜렷이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밤에, 

그녀가 귀신이 되었다가 또 다른 날엔, 저승사자가 되었다가 

담날 밤엔 악마가 되었다가 하며 내 꿈에서 나를 죽일 듯, 괴롭혔다.

우울증 치료도 거부했던 그녀의 정신이 조금씩 망가져 가던,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아니 우리 세 자매는 온전히 그녀를 껴안지도..

제대로, 손을 놓지도 못하고서 전전긍긍 댔다.


하지만,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로 나타난 그녀는

"집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난다."라고 하며, 

혹여, 자식들 걱정시킬까 봐 밖에서 밤을 새웠다고 했다.

그날은!! '니년들도 다 싫다'며 독립 선언을 하고, 월세 방을 얻어 나갔던 그녀가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와 비로소 안긴 역사적인 날이었다.

 

바다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 빠졌다가,

다시 날아오른, 날개쭉지가 물에  젖은 지친 나비처럼.

그렇게, 그녀는 그제야(알츠하이머가 오고 나서야), 

우리 세 자매 품에 올곧이 안겼다.


여전히 '도둑년'이라며, 내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물건을 던져도,

그날 그렇게 그녀가 내 품에 들어와 안긴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그녀가 주인공인 '식스센스급인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발 뻗고 편안하게 잤다.

그리고, 오랜만에 내 입에서

"엄마.. 내가 엄마를 돌볼 수 있게 해 줘서 천만다행이야'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길고 편안한 한숨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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