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내느라...
아이와 함께 많은 고양이를 키울 적당한 집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능을 봐야겠다고 했다. 병원에 환자로는 갈 수 없지만 대학 병원에서 근무는 할 수는 있겠다며 방사선과를 지원해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검색해서 보니 아이가 올봄에 기적처럼 검정고시를 치르고 받은 성적으로도 집 근처 전문대 방사선과는 수시로 지원했을 때 합격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의 속내는 정말 의료계 쪽 일을 하고 싶은 것보다는 병원에 환자로는 차마 가지는 못하니 대신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만큼 밤에 병원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한 번씩 올라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아기 고양이들을 보며 힘을 내거나 엄마와 얘기하며 순간순간 힘든 감정들을 넘겼다. 그리고 하는 말이 방사선과에 합격해서 학교를 다니면 바빠질 테니 고양이는 자기가 완전히 자립할 때까지 다섯 마리로 만족해야겠다고 했다.
그랬던 아이가 일주일도 안되어 다시 클라리넷을 해야겠다고 목표를 바꾸어 방사선과를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방사선과에 진학해도 항공대 항공정비과에 다닌 경험과 비슷할 거라고 잘 다닐 자신이 없다고도 했다. 그리고 뭔가 진로를 찾으려 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클라리넷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예전 클라리넷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레슨을 받기로 했다. 대신 또 마음이 바뀔 수 있으니 우리 부부는 방사선과는 그대로 지원하자고 했다. 그 사이 아이는 한국이 아닌 유럽과 미국을 샅샅이 검색하며 자기가 진학할 곳을 찾았다. 솔직히 나의 심정은 아이가 진학보다는 실제로 클라리넷 곡들을 시간을 갖고 하나씩 배우며 완성해 가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누렸으면 했다. 진학 스트레스를 받느니 아이의 정서와 마음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고양이들을 돌보면서 음악 자체에 심취했으면 했다. 그러나 아이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 성격이었고 음악도 궁극적으로는 수단이었고 어떤 목표의 성취의 대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클라리넷 레슨을 오랜만에 받고 온 날 밤에 아이의 감정이 요동쳤다. 자신이 선생님 앞에서 떨리는 것을 꾹 참고 레슨을 받고 와서 하루 종일 힘들게 연습하는 것 대비 큰 비용을 들여 클라리넷을 배우는 것의 가치를 잘 못 느끼겠다며 예술계에서 있었던 안 좋았던 기억들을 그새 잊어버리고 또 일을 벌인 자신을 한탄했다. 그냥 하루 종일 밥을 안 먹고 살을 빼며 부모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고양이들과 따로 살면 안 되겠냐고 하소연하였다. 아이의 거식증 증상이 남아 있어 도저히 적당히 살이 붙은 자신의 모습이 매우 보기 싫었던 것이다. 아이가 살이 붙은 이유는 여성 호르몬을 차단하는 주사의 부작용 때문이기도 하였다. 올 초에 여성 호르몬 차단제를 맞았을 때만 해도 별다른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요 근래 아이는 때아닌 갱년기 증상에 시달렸다. 얼굴이 갑자기 화끈거리면서 열이 올라와 더워서 견딜 수 없어했고 밤에 잠을 잘 못 이루거나 달고 맵고 기름진 음식들이 당기고 먹어도 배고프다며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지금까지 두 달여 정도 아이와 걸어온 일상들을 길게 적어 보았습니다. 아이는 계속 현재의 일상 안에 살아가고자 아니 살아내고자 장래의 일들을 꿈꾸며 자기 할 일을 찾았지만 매번 포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이가 포기하고 실패한 일들을 죽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매우 불안정한 정서를 지닌 아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치열하게 살아내었는지를 적었습니다. 분명 아이는 단순히 날마다 먹고 자고 숨 쉬는 활동-생명이 살아가는 고귀한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는 못 하지만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매번 생각해 내 목표를 세우고 계획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더라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자살, 자해 행동은 더 이상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