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버스 내 하차 문 쪽으로 몰려간 사람들이 우르르 하차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눈만 잠깐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느새 20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던 것이다.
찬희는 못 내릴까 봐 화들짝 놀라며 하차 문 쪽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이른 새벽 시간이긴 했지만, 공항 국제선 버스 정류장에는 하차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사히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찬희는 다시금 겨울의 한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곧장 직원용 락커실로 달려갔다.
락커실에는 히터가 틀어져 있긴 했었지만 전원을 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바깥 온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락커실로 들어온 직원들은 하나같이 덜덜 떨며 각자의 락커 앞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한 찬희는 락커실에서 나와 곧장 공항 국제선 출국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직원용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후, 맞은편에 있는 스카이면세점을 향해 황급히 걸어갔다.
면세점에 들어서니, 옆 브랜드 직원인 수현 언니가 먼저 출근해서 벽장의 먼지를 털어내며 청소하고 있었다. 찬희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브랜드 직원인 조선족 려화도 찬희를 따라 면세점 안으로 들어왔다.
수현과 려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찬희는 쇼케이스를 열심히 닦으며 상품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오픈과 동시에 출국을 앞둔 손님들이 면세점 매장으로 달려올 테니 서둘러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3일간 시작되는 설날 연휴를 앞두고, 면세점 직원들은 전주 금요일인 오늘부터 출국 예정객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수도권 공항이 아닌 지방 공항이었지만, 연휴가 길어서 놀러 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긴 연휴에 놀러 가면 얼마나 좋을까.'
찬희는 남편과 함께 해외 휴양지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휴... 절대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아들 둘을 홀로 키우신 시아버지는 시어머니 제사와 명절만큼은 악착같이 챙겼다.
그런 날만큼은 무조건 모든 가족들의 얼굴을 보면서 함께 해야 한다는 시아버지의 고집을 절대 아무도 꺾을 수는 없었다. 물론 시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찬희도 진우와 둘 만의, 아니 서후까지 세 명의 가족이 즐기는 명절을 맞이하고도 싶었다.
그런 찬희에게, 명절에도 여행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처지였다.
게다가 명절이면 평소보다 해외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훨씬 늘어나서 공항 면세점은 1년 중 제일 바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면세점 직원들에게 명절 연휴란 것은 머나먼 다른 나라의 얘기일 뿐이었다.
구매 여부와는 상관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을 맞이하랴, 직원들은 명절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근무를 해야만 했다. 시댁에는 명절에 음식도 안 하는 며느리라는 무언의 눈치를 받아가면서도 말이다.
그럴 때마다 찬희는 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야, 윤찬희. 넌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거야?'
하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찬희가 속해 있는 브랜드의 직원은 총 3명이었다.
3명의 직원이 새벽 6시 반부터 밤 9시 반까지 교대 근무를 해야 했다. 면세점은 연중무휴라 명절 연휴 3일 동안에도 한 명씩 번갈아 가며 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결혼을 아직 하지 않은 막내 직원이 선배들에게 그동안 본의 아니게 양보를 해주어 명절 연휴 3일 중 마지막날 휴무자는 항상 막내 직원이 당첨되었다. 덕분에 연휴 중 첫째 날, 둘째 날은 선임 직원 2명이 번갈아 가며 쉴 수 있었다.
하지만 막내 직원도 올해는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할 거라고 며칠 전 선언했었다.
그렇게 되면 유부녀 3명이 어떻게 명절 연휴를 나누어 쉴지 쟁탈전을 벌일 생각에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