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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4, 2025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by 헤매이는 자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월요일이다.

많은 사람들과 전체회의를 한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기분 탓이겠지. 언제나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은 이 기분은.

참 좋다. 나는 더 행복한 사람이 됐다.

그녀라는 한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 일상이 이렇게 행복해지고, 능률이 올라가고, 더 배울 수 있다니.


최근엔 그녀와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갔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 수작이었다. 개인적으로 7.5점.

영화관에 우리가 너무 일찍 입장했는지, 불이 꺼져있는 큰 영화관에 우리 둘만 있었다.

뭔가 이상했는지 그녀는 밖으로 직원에게 질문하러 나갔고, 나 혼자 앉아있었다.

그녀는 내가 깜깜한 극장에 혼자 있을 때 무섭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나는 원래 무서움이란 게 없는 사람이다. 지극히 조심스러운 성격이긴 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어떤 무서운 영화를 봐도 무섭지 않고, 어떤 놀이기구를 타도 소리 질러본 적이 없다.

센 척하는 건 아니고, 그냥 내 신변에 실제적 위협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면 무섭지가 않다.

어차피 무서워해봤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인 듯하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게 된 후, 그녀를 잃거나,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가능성들이 너무 무서워졌다.


그래서 그녀가 없는 어두운 곳에 혼자 남겨져 있어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돌아온다니, 그녀와 둘이 있을 수 있다니, 너무나 설레고 있었다.

나는 그녀 덕에 많이 변했다. 더욱 단단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그녀는 오늘도 아침부터 운동하고, 저녁에도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는다.

부지런한 그녀의 모습에 자극을 받는다. 나도 일하는 중간중간에라도 운동을 섞어본다.

구글 알고리즘은 점점 운동에 대한 것들로만 가득 찬다. 따라가기도 힘들지만, 좋은 동기가 된다.


나는 그녀 덕에 많은 것을 배웠다.

문화 전반에 대해 조예가 깊고 업무 경험도 많은 그녀라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접했다.

한국 문학, 건축의 사조, 발레 등의 무용, 클래식 음악, 한국 영화와 드라마, 한국 미술사 등등.

그녀와 보면 무엇이든 흥미롭고 즐겁기 때문에, 모르는 주제에도 쉽게 빠져들었다.


최근에는 조각에 대해 더 관심 가질 일이 있었다.

나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을 원본이든 캐스트든 이미 수없이 봤다. 미국 로댕 미술관도 가봤다.

어느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도, 로댕의 작품은 제일 중심에 최고로 중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지옥의 문도 봤고, 생각하는 사람도 봤다. 하지만 솔직히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녀와의 이번 여행에서는 칼레의 시민을 처음으로 봤다.

그녀가 칼레의 시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기에 설명해줬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84년에 100억원을 들여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전시 팜플렛에도 이번 특별 전시의 메인 작품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 칼레 시를 구한 시민들의 자결과 희생에 대한 작품이라고 한다.

리서치를 해보니, 이 일화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과장된 바가 크다는 비판이 많긴 한 것 같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있는 시민들이, 그에 합당한 책임을 다해 총대를 맸다는 점에서는,

과장 여부를 떠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손색이 없는 일화라고 여겨진다.


그녀의 설명을 따라 자세히 보니, 손 등의 신체 부위가 과장되어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사실주의적인 인체비례와는 다르게, 현실이 아닌 픽션에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그리고 영웅적인 당당한 모습이라기보다, 희생을 감수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녀와 같이 보지 않았다면, '아아, 로댕의 작품이구나' 하고 흘낏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을텐데,

그녀 덕분에 좀 더 자세히 보게 됐고, 느낄 점이 많았다.


마치 회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인상주의가 등장하면서 중세의 사실묘사에서 벗어난 것처럼,

로댕의 조각은 실제로 잘 취하지 않는 동작과 덜 깎은 듯한 기법으로 역동성과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와 다니기만 했을 뿐인데, 그녀가 한 마디 거들어줬을 뿐인데, 나는 조금 더 알게 됐다.


세상의 모든 주제는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그 어떤 주제도 한낱 한 명의 인간이 100%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익히고, 배워나가는 과정을 반복한다.


나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관심을 둔 것에만 빠져있던 나에게,

그녀와의 만남은 새로운 것들을 일깨워주고, 나를 좀 더 둥근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그녀는 내가 평생 만나본 사람 중에 제일 육각형에 가깝고 동글동글한 사람이다.

나의 뾰족함을 부드럽게 안아준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을 포용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지금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시국에서,

전 직장의 동료들에 대한 정도와 의리를 저버리듯 그녀가 새로운 커리어를 찾는 것이 맞는지,

매일 마음이 편치 않은 그녀의 모습에서, 칼레의 시민들이 겹쳐보인다.

사회적 지위를 갖췄지만, 꼭 자발적으로 희생할 의무는 없는데도, 마음을 쓰는 그녀의 모습.


그녀는 '뭘 그런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해' 라며 손사래를 치겠지만,

나는 그녀만큼 자신의 공동체와, 동지들과, 스스로의 믿음에 로열티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녀야말로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니 물론, 쌓아온 부나 권력에 비해, 책임과 의무를 더 신경쓰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처럼 생계에만 신경써온 사람은 이럴때 그녀 앞에선 참 겸손해진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면서도, 나와 삶을 합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며 반복해서 말해준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한 친구들, 고생하는 동료들, 또 자신이 혼자 열심히 쌓아온 삶.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조금은 내려놓고 나에게 와줬다.

그 무엇보다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매일 이야기해줬다.


그녀가 내게 준 가장 큰 충성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나는 내 평생 그녀에게 그 누구보다 로열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한 기회비용이, 온 세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 할지라도.


0.1초도 고민되지 않는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의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고,

그녀의 사람들에게 그 누구보다 충직한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그 누구에게보다 나에게 로열한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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