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녀와 함께 살 집으로 이사할 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흉물스럽거나 쓸데없는 것들은 이미 많이 처분했지만, 아직도 나의 살림에선 덜어낼 것이 많다.
나는 누가 보면 프로페셔널 컴퓨터 해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책상 위에 전자기기가 많다.
텔레비전 3개, 모니터 4개, 아이패드 1개, 안드로이드 타블렛 1개. 주변엔 스피커 10개를 360도로.
사운드바, 오락기, 컴퓨터, 키보드, 마우스, 조이스틱, 프린터 등 모든 것들을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산다고 하니 이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일에 몰두하고 싶지 않다.
일 중독에 걸린 내가, 유일하게 일에 신경쓰지 않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녀다.
그녀가 혼자 할 수 없는 엔터테인먼트를 집에 두고 싶지 않다.
내가 읽던 책은 그녀가 읽을 수 있고, 내가 쓰던 시계는 그녀가 찰 수 있지만,
내가 하던 게임기는 그녀가 다룰 줄 모른다. 다 처분하기로 한다.
조이스틱을 잡고 싶지 않다. 그녀를 잡고 싶다.
수없이 많은 화면들도 필요없다. 이제 나는 그녀와 함께 바라볼 화면 하나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내가 제일 보고 싶은 스크린은 그녀의 얼굴에 발린 선스크린이다. ... 썰렁.
스피커가 10채널일 필요도 없다. 그들이 흉물스럽게 차지할 자리에, 그녀와의 추억들을 두고 싶다.
그리고 내가 제일 듣고 싶은 음악은 스피커가 아닌,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다.
She is music to my ears.
시커먼 색의 물건들. 다 정리하고, 그녀 눈에 즐거운 것만 있으면 한다.
그녀처럼 하얗고, 앙증맞고, 빛나는 것들로.
덜어낼 것과 반대로, 그녀와 평생 산다고 생각하니 더하고 싶은 살림도 많아진다.
그녀와 어울리는, 순백의 색에 가까운 밝은 색깔들로 최대한 인테리어를 하고 싶어진다.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넣을 앨범 표지부터 이미 하얀색으로 해뒀다.
그녀의 신발들을 어떻게 둘지 그려본다. 그녀의 옷이 걸려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뻐한다.
그녀와 한 집에서 따뜻하게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처음으로 네스프레소 머신을 리서치해본다.
그녀와 한 집에서 따뜻하게 차를 마시고 싶어서, 처음으로 전기 케틀을 하얀색으로 찾아본다.
밀키트를 전자렌지로 요리할 줄밖에 모르던 내가, 그녀가 쓸 믹서기를 평생 처음으로 주문해본다.
피부와 입술이 쩍쩍 갈라지고 일어난 채로 살던 내가, 가습기의 기능과 리뷰들을 비교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갑자기 호모 사피엔스가 된 수준의 진화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인생 하나를 살렸다.
독서소녀인 그녀와 살다보면 자연스레 쌓일 책들을 둘 공간이 필요하다.
회사에서 문서를 읽는 것 외에는 독서를 끊다시피 하고, 전자책만 읽던 내가 가진 책들은,
전형적인 '커피테이블' 장식에 불과한 책들이었다.
시계 브랜드 도감. 게임 일러스트 모음집. 스파이더맨 특별호. 10대에 머무른 나의 정신연령.
한 번 읽고 잊어버릴 책들. 속종이보다는, 겉의 커버가 더 두꺼워서, 커피를 흘려도 안 젖을 책들.
예전의 책들은 조금 덜어내고,
그녀와 새로 읽어나갈 책들을 그려본다.
그녀와 여행하면서 즐겁게 읽은 책이 기억난다.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
한강 작가의 추천도서라기에 그녀가 센스 있게 골라줬고, 그녀 덕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들이 고등학생들이라, 나의 학창시절이나 그녀를 처음 만났던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고,
소소하면서도 강력한 반전들이 몇 번이나 있어서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읽는 내내 그녀가 내 곁에 있었기에 더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삶은 비정하고 예측 못할 일투성이인데, 우리네 삶에 어떻게든 극복해내도록 버틸만한 언덕,
손 잡아줄 만한 사람, 기댈만한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심겨있다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녀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질문을 던질 사람.
나의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없어도, 관심을 가져줄 사람.
그녀를 만나서 다행이다. 내 평생 그녀만큼 나의 말을 잘 들어준 사람은 없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수없이 봤다.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 얘기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도 가려서 잘 하면서, 나의 말을 가려 들어줄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내가 유연하고 명랑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며, 함께 성장해나갈 사이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책에 있는 게임을 언젠가 그녀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5가지 문장으로 나를 소개할 거고, 그중 하나는 반드시 거짓말이니, 어느 것인지 맞춰봐!'
그녀의 진실을 4가지나 배울 생각에 즐겁다.
이사를 준비하며 나의 물건을 덜어내고, 그녀와의 물건을 준비하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그녀는 내가 일이 바쁜데 신경쓸 것이 많다며 걱정해주지만, 나에겐 놀이와도 같았다.
나만의 물건은 줄여가고, 그녀와의 추억이 묻은 것들을 늘려가는 놀이.
내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다시피 간과한 부분은 조금 더 신경써서 챙겨보고,
내가 맥시멀리즘 마냥 생각없이 쌓아놓던 것들은 덜어내본다.
마치 내 마음과도 같다.
나 혼자만을 위한 생각보다는, 그녀에 대한 생각이 더 커져만 간다.
오늘도 내 안에 그녀를 가득 채운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의 그녀는 나의 몸과 마음을 걱정해주는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먼저 신경쓰는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나란 사람 그대로 믿고 모든 것을 맡겨주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