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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라해 Dec 23. 2024

아픔을 숨기는 게 사랑인 걸 넌 알까

그냥 글이 써졌어

"아들, 엄마 몸은 어때?"


"응? 나 지금 친구들이랑 밥 먹고 있는데? 나오기 전에 엄마 괜찮아 보였었는데?"


해외에 일정이 있으셔서 해외에 가 있는 아빠에게 온 연락은 엄마의 건강여부였다.

나가기 전에 엄마와 인사를 했었는데, 그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아빠의 갑작스러운 연락이 '내가 혹시나 엄마의 아픔을 알아채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가져왔다.


"엄마 대상포진 걸렸나 봐, 그래서 아침에 응급실 다녀왔대, 아빠도 교회 집사님한테 들었어."


"그래..? 알았어요 엄마 확인해 볼게요 아빠"


저녁밥을 먹고 친구들과 2차 일정이 있었는데, 그 약속을 가지 않고 바로 집을 갔다. 엄마가 7년 전 대상포진으로 힘들어했던 기억이 나기도 했고, 유럽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오고 쉬지도 못하시고 바로 교회일을 했던 엄마의 모습이 집 가는 길에 계속 잔상으로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엄마, 왜 이야기 안 했어"


"걱정할까 봐 그랬지, 너랑 아빠 다 바쁘고, 여행 다녀오고 피곤할 텐데 누나 한 테도 그래서 이야기 안 했어"


"그래도 이야기했어야죠... 나랑 아빠 다 다른 사람한테 듣고 얼마나 깜짝 놀랐겠어..."


"그니깐, 엄마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어"


이렇게까지 닮지 않아도 괜찮은데, 내 이야기를 하는 걸 어려워하는 게 내가 엄마를 닮았구나... 마음은 너무 답답하고, 서운했는데 이해가 됐다. 만약, 나도 지금의 엄마 상황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엄마와 아빠에게 말을 안 했을 거 같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픔을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를 알기에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했다가 포기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걸 배려라고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혹시나 마음이 좋지 않을까 봐 말은 안 한 건데, 늦게나마 알게 된 사람은 나에게 서운함을 표출했다. 배려가 서운으로 바뀌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 그런 경험이 있음에도 이야기하는 게 너무 어렵다. 내 상황보다, 상대방의 상황이 더 보이는 사람이기에 나는 여전히 배려라는 이름으로 아픔을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하는 걸 어려워한다. 나만 이러면 괜찮을 텐데, 나보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엄마. 내가 정말 엄마를 닮았구나. 속상하고 서운하지만, 나는 그래도 알고있다. 엄마는 아픔을 숨긴 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이게 서로의 사랑을 해석하는 방식이라면 그래,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자. 적어도 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이렇게 사랑을 또 배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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