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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소곤 Dec 26. 2024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어른되기


신생아실 간호사였을 때에는 3천만 원짜리 인큐베이터에 인공호흡기, 대학병원의 질 높은 의료 수준으로 아이를 돌보는 것이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최고가 목표였기 때문에.

그러나 신생아황달을 진단받은 나의 아이에게 소아과 의사는 대학병원 진료를 권유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아이를 내가 일하던 병원에 입원시킨다는 것은 말이지.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근무를 했을 때는, 최고의 의료 수준이 아이에게 너무 적합해서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이를 껴안고, 스킨십을 하는 이것을 내 아이에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하게 했다. 의사는 혹시나 담관이 막혔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달수치는 12이다. 냉정하게 보아도 입원 수치가 맞았다. 의사는 혹시 모르니 하루만 모유를 끊어보고 내일 다시 진료를 보기로 했다. 나는 바로 분유를 타서 아이에게 많이 먹였다. 분유를 많이 먹고, 소변과 대변으로 황달이 많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다음 날 다시 진료를 봤고, 아이의 황달 수치는 6이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나 많이 수치가 내려가다니. 책에서만 보던 모유황달이구나. 1%에만 보이는 수치이다. 모유의 유일한 단점. 황달을 진행시킬 수 있는데 그 1%에 해당하는구나. 이틀 후는 4이고, 다시 모유수유를 했을 때는 다시 6이었다. 의사는 이렇게 수치가 내려가면 슬슬 오르더라도 입원할 정도의 수치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다행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내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신생아에게 정서적으로 지지를 해주는 것은 거의 부재라고 보면 된다. 기저귀만 입힌 채로 생명의 끈을 잡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내 아이 같은 심정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코 혼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말이다. 내 아이가 소중하듯이 남의 아이도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좀 더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의 삶은 목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이만을 바라볼 때의 나의 삶의 목표는 최소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아이가 나를 바라볼 때 최소한 나는 부끄럽지 않은 엄마여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지는 못 할지 언정, 버리지는 않는다. 내 아이가 봤을 때 최소한 길거리에 쓰레기 버리는 엄마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내가 죽을 때 엄마가 내 엄마여서 너무 좋았어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나의 욕심이지만, 최소한 엄마가 내 엄마라서 부끄러워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 나는 인생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할 것이고, 한 발 더 나아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가끔 흐트러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한다. 내 아이들이 CCTV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이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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