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에서의 이런 체험은 대부분 아이들이 한다. 그나마 참여하는 어른이라면 아이들과 함께 온 아빠들이다.
그런데 나는왜 허공에 매달려 있는 중이지?
제주 한달살이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액티브파크'라는 곳으로 클라이밍을 하려고 왔다.
그때 당시 7살 10살이었던 나의 딸아이들은 클라이밍이 처음이었다.
시간대별로 신청인원이 정해져 있었기에 갈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하여 미리 예약한 후, 방문했다.
같은 시간대의 체험자들이 모여 안전요원에게 설명을 들은 뒤 안전장비(하네스)를 착용하고 입장하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둘째가 못하겠다 선언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분명 오기 전에는 해보겠다 하지 않았니?
"괜찮아 솔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할 수 있어. 누구나 처음이 어려운 거지. 들어가서 쉬운 거부터 하나라도 해보자."
나의 말들을 다 튕겨내듯이 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새로운 경험을 해볼 기회를 거절하는 아이에게, 속상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화가 나려 한다.윽박지르려는 내 마음에게 얼른 '멈춤'을 외쳤다.
잔뜩 겁먹어서 못하겠다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려는 아이를 억지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일아닌가.
그렇다고 25000원을 날릴 수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랑이 사이로 끈을 매달고 있는 아줌마는 나뿐이다. 자고로 엄마들의 포지션은 전화기를 들고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던가.
주렁주렁 안전장비를 달고 있어도 엄마의 본분을 놓칠 수는 없는 법. 첫째 아이를 따라다니며 순간을 포착하고, 아이의 도전을 담아낸다. 쌍따봉을 힘차게 들어 올리며 감탄 어린 눈길로 칭찬도 보낸다.
그런데 나는 k줌마다. 허벅지에 꽉 끼워진 끈이라고는 가터벨트도, 카우보이 권총벨트도 차본적이 없는데 지금 나의 허리 허벅지에는 무언가가 둘러져있단 말이지.
본전 생각이 났다.
내가 등반할 챌린지 아래에 있는 고리에 '철컥', 내 허리춤에 달린 고리를 채운다. 아래는 돌아보지도 않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 맹렬히 질주한다. 이미 나의 팔과 다리는 버저를 향한 결의를 담아 무아지경으로 내디뎌지고 있었다. 그들의 수고를 딛고 드디어버저가울렸다.
얘들아 엄마 봤지? 장난 아니지?
성취감에 취해 있는 내가 맞이한 다음 미션은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차라리 올라온길을 거꾸로 재생하듯 내려올 수 있다면 좋으련만.
홀드를 단단히 움켜 잡고 있던 손을 떼야한다. 양손을 모두 떼서 내 몸에 달린 생명줄을 잡아야 한단다.
오른손을 놓았다. 공중에 있는 탓에 중력의 영향을 더 받은 듯,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다음 왼손을 놓았다. 아니, 놓기 전에잠깐만.그러면 내가 어떻게 되는 거지?
번지점프대에서 누가 밀어준다면 모를까 스스로 뛰어내려야 하는 정도의 망설임이 머릿속으로 수없이 오간다.
오른손을 홀드에서 줄로 옮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왼손은? 잡고 있는 홀드에서 손이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진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아니냔 말이다.
올라와서 내려다보니 제법 높다. 까마득하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추격전을 벌이다 빌딩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손에 점점 힘이 빠진다. 이미 한 손은 놓친 채로 한 팔에 의지해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중이다. 주인공에게 천사가 다가와 속삭인다. 당신에겐 날개가 있답니다. 손을 놓고 날아올라 보세요.
그 천사 말을 믿으실 수 있냐고요. 내 심정이 딱 저러했다.
내 허리춤에 달린 줄이 고공낙하 하지 않게 자동으로 조절되니, 손을 놓으라고 한다.
저 63 빌딩 아래 계신 안전요원께서 .(나의 체감높이는 63 빌딩 아니 부르즈 할리파 꼭대기에 버금갔다)
자연분만의 진통 속에서 내가 수없이 되뇌었던 말, 아이스 박스 속, 내 머리통만 한 살아있는 박달대게를 들어 올려 찜통까지 옮기면서 계속 외쳤던 말, 그 말을 다시 외쳐야 했다.
나는 할 수 있다. 엄마니까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해내야 한다.
비명과 함께 양손을 놓자 등에서 날개가, 나오진 않았지만 약간의 휘청거림과 함께 질질질 내려왔다. 분명히 빠르지 않은 속도로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줄을 꽉 쥔 채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모양새로 멋있는 착지는 실패.그렇지만해, 해냈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도 어른과 똑같이 꼭대기의 높이가 무서울 텐데, 안전요원의 말에 따라 곧잘 손을 놓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세상에 대한 못 미더움으로 손을 놓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 즐겨 타던 놀이기구는 무섭지만 재미있었다. 이제는 놀이기구의 스릴과 더불어 안정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어른이 되어 더 무서워졌다.가끔씩 뉴스에 놀이동산 사고가 등장하지 않는가.(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전정 기관의 노화로 인한 균형감각의 저하도 한몫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귀신을 참 무서워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람이 무섭지 귀신이 뭐 무섭니" 하셨는데 지금은 그 말이 이해되는 어른이 되었다. 지금은 귀신보다 사람이 만든 놀이기구가 더 위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아이들 고유의 천진함과 어른에 대한 신뢰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두 해가 더 지난겨울에 제주를 다시 방문했다. 9살이 된 둘째는 클라이밍에 도전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멋지게 해냈다.
낯섦과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던 둘째 아이.2년 전,내 욕심에서 나오는 눈총을 아이에게 쏘아붙이지 않았기에 적어도 그날이나쁜 기억으로남은 건 아니었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