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정독도서관
[ 보통의 하루 : #서울특별시교육청 정독도서관 #소담정 ]
눈이 내리는 주말 아침이다. 오늘은 한 달 전에 예매했던 연극을 보러 가는 날이다. 오후 3시가 공연 시작이므로 잠깐의 시간 동안 근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눈도 오고 쌀쌀하던 참에 따뜻한 도서관은 진리다.
-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길 48
청년 때 한번 와보고 가족과 함께 첫 방문이다. 가물가물해진 기억 속에 우리를 먼저 반겨준 건 추운 날씨 속에 얼어붙은 연못이었다. 살얼음을 띠며 연못이 얇게 빙판을 만들어냈다.
"저기 걸어보고 싶어요."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 다닙니다."
아이들은 한때 유행이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빙판 위를 걸어보고 싶다 했지만
"발 딛자마자 가라앉을 걸."
이라는 말로 아이들의 소망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대신
"저기 봐. 고드름이야. 물레방아에 물이 흐르다가 고드름이 됐네. 와, 고드름은 거의 본 적 없잖아."
"신기하다. 만져보고 싶어요."
만져보고 싶지만 그곳까지 손이 닿지 않기에 그저 울타리너머로 겨울의 하늘과 연못만을 바라볼 뿐. 연못 옆에 오두막 같은 정자도 있었는데 추운 겨울이 아닌 봄, 여름, 가을에 방문한다면 저 정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것도 매력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맑은 날의 겨울 하늘이 정말 눈부시게 시리다. 이곳에서 눈부신 풍경을 보게 되다니. 겨울의 따스한 햇살이 무척이나 반갑다.
정독도서관 앞에 서니 간판이 보인다. 간판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적혀있었다. 1900년 한국의 첫 근대 중등교육기관으로 출범한 경기고등학교의 본관으로 1938년 건축되었으며, 1976년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현재 서울특별시교육청 정독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38년 당시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벽 구조,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최고급 학교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관학 중등교육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단순 도서관을 넘어서 역사적인 장소였다. 겉으로 보기에도 오래되고 역사적인 건물의 도서관처럼 보인다. 그러나 웬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서 선생님께서 형형색색의 카운터에서 맞아주시고 양 옆으로는 쾌적한 어린이실과 청소년관이 있다. 그리고 계단이 앞으로 펼쳐져 있었는데 계단을 올라서면 기존의 도서관처럼 열람실, 자료실, 사무실 등이 있다. 예전 건물을 유지하면서 현대식으로 새롭게 리모델링을 했다.
어린이실로 곧장 들어갔다. 색다른 풍경이다. 바닥에 앉아서 읽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며 중간중간 오롯이 책을 보고 집중할 수 있도록 벽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도 있다. 그곳에는 작은 소파가 자리를 잡고 있어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책의 세계에 빠져드는 아늑함이 느껴진다. 게다가 2명, 4명이 오순도순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이렇게 공간이 알찬 어린이도서관이라니. 장소가 알찬 만큼 책도 분야별로 다양하게 책꽂이에 꽂혀 있다.
바닥에 앉아서 읽을 수 있는 공간은 대부분 유아도서로서 엄마, 아빠랑 온 영·유아 친구들이 많았다. 어린아이들을 도서관으로 데려와서 맘껏 뛰놀고 책과 어울리게 하는 부모들은 정말 대단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도서관과 친구라면, 그보다 더 귀한 시간이 있을까.
우리는 4인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사랑이는 과학 잡지, 기쁨이는 만화책을 골라왔다. 어떤 책을 읽어볼까,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던 차에. '사금파리 한 조각'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예전부터 제목은 들어봤던 책인데. 아이에게 읽히게 전에 한번 읽어볼까, 책을 꺼내본다.
사금파리 한 조각. 작가 이름을 보니, 오호 이 작가는 우리 집에 있는 '초원의 연꽃' 작가가 아닌가. 바로 '린다 수 박' 작가님이시다. 이 작가님은 미국 한인 2세로서 아름다운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려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어쩐지. 그런데 사금파리 한 조각은 작가 이름과 책 표지가 조금은 다른 느낌이랄까. 책 표지는 아주 오래된 동화책과 같은 느낌의 거칠고 흑백 시절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어떤 내용일까. 이국적인 작가와 그가 풀어낸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주인공 '목이'는 고아다. 두루미 아저씨와 다리 밑에서 살며 쓰레기를 주워 먹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우연히 목이가 고려청자 장인인 민 영감 밑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그려낸 이야기다. 책은 1,2권으로 이루어졌는데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어 민영감과 목이, 그리고 두루미 아저씨께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건 '아저씨 다리가 정말 안 됐어요.'라는 뜻이지? 오늘 저녁에 생선을 못 먹었으니까.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건 어차피 우리 모두에게 시간 낭비일 뿐이야." (p.83)
라는 대목은 정말이지. 다리를 절며 따뜻하게 누울 집 하나 없이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가. 정말 훌륭한 마음가짐을 가진 두루미아저씨. 이 아저씨가 목이를 키워냈기에 목이 또한 민영감 밑에서 그 모든 어려운 일을 감당했으리라 생각된다. 책 2권을 읽는 동안. 2,3시간이 흘렀을까. 배가 고파온다. 이제 육의 양식을 채울 차례다.
식당 가는 길에 청소년관은 어떤가 슬쩍 들어가 봤다. 출판사별 중고등학교의 교과서를 살펴볼 수 있으며 창가에 책상과 의자가 배치되어 공부하기에도 좋은 공간이다. 다양한 모양의 소파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어 책을 가볍게 읽기에도 아늑했으며 놀라운 건 '점자도서'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각 대학 모집요강도 마련되어 있어 다양한 정보를 얻기에도 좋았다. 오호라, 사랑이가 중학생이 된다면 여기가 딱이겠군, 싶다.
- 정독도서관 내 구내식당
배고프다. 책을 읽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소담정 구내식당으로 들어서자 예전 체육관 공간이었을까. 천장도 높고 공간도 넓다. 말을 하면 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넓은 공간만큼 테이블도 많다. 몇몇의 아이들과 부모님, 어르신들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한편에는 자그맣게 매점도 있다. 이제 도서관 구내식당 몇 번 다녀봤다고 아이들이 익숙하게 수저를 챙기고 자리에 앉는다. 사랑이는 늘 그렇듯 찌개류, 오늘은 순두부찌개를 골랐고 기쁨이는 라면, 남편은 돈가스를 골랐다. 음식을 받고 보니 옆 테이블의 오므라이스도 맛있게 보인다. 원래 남의 떡이 더 맛있고 크게 보인다고 했던가. 늘 밥을 배불리 먹는 우리 식구는, 일단 밥을 먹고 추후에 연극 끝나고 간식도 챙겨 먹자고 약속한다.
도서관 구내식당은 진리인 듯. 순두부찌개는 추운 속을 달래주기에 딱이었으며 돈가스는 바삭하고 고기도 두툼하니 맛있다. 특히 샐러드 양배추와 오랜만에 먹는 마카로니는 상콤하다. 남편과 아이들 역시 맛있다, 맛있다 칭찬을 하며 배고픈 배를 맛과 양으로 두둑하게 채운다. 맛과 가격이 으뜸인 소담정 구내식당. 이제 본격적으로 도서관의 구내식당을 찾아다녀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맛과 재미가 쏠쏠하다.
배불리 먹었겠다, 이제 연극 보러 가야 할 시간이다. 도서관을 나서기 전에 화장실 들리자며 건물 뒤편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어, 저거 우물 같은데?"
"진짜다."
갑자기 눈앞에 우물이 나타났다.
이 우물 돌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정독도서관 터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독도서관 부지는 갑신정변 이전에는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터였다가 갑신정변 이후 박제순의 소유로 바뀌었고 우물 돌에는 박제순이 쓴 것으로 보여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라고 안내되어 있다. 와, 옛날부터 자리 잡고 있던 우물 돌이라니. 까치발을 들어 안으로 내려다보니 물이 고여있긴 하다. 눈이 녹아서 물이 생겼나. 사진상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우물 돌에 한자로 쓴 글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이 도서관 터가 한국사에서 보고 듣던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터였다니. 그런데 박제순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검색해 보니 그는 을사오적의 한 명으로서 친일파 사람이다. 그럼 그가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터를 빼앗고(결과적으로) 이 우물에 자기 이름을 새겼던가. 아, 없애버리기도 가지고 있기도 애매한 우물 돌이구나. 화장실 가는 길에 우연히 역사적 인물과 장소를 만나고서는 주차장으로 간다. 이제 연극 보러.
오늘 연극 보러 왔다가 잠깐의 시간 동안 책도 읽고 점심도 먹었네. 도서관은 좋은 것 같아. 책도 마음껏 볼 수 있고 밥도 맛있고 말이야. 보고 싶은 책 많이 읽었어? 너희들이 책에 집중해서 덕분에 엄마도 '사금파리 1,2'권을 다 읽었지 뭐야. 날씨 추운데 따뜻하게 좋은 시간이었어. 그런데 우물 돌은 신기하다. 도서관에 우물이 왜 있나, 처음에는 가짜인 줄 알았잖아. 그런데 우물 돌 덕분에 이 도서관이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터인 것도 알게 됐어. 신기하다. 이곳이 상당히 오래된 장소구나, 싶다. 하긴 이곳을 나서면 한옥마을도 있고. 그래, 아까 나가다가 헌법재판소 봤지? 너희들이 헌법재판소 어디 있냐고 궁금했잖아. 그런데 떡 하니 우리 눈앞에 나타나다니. 나라의 중요기관이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이 오래되고 역사적인 곳임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지. 연극 덕분에 오늘 여러 곳을 보게 됐네. 사실 정독도서관 내에 박물관도 있는데 그곳을 못 가봐 아쉽기는 하다. 다음에 또 오지, 뭐. 이제, 연극 재밌게 보자.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도서관과 친구라면,
그보다 더 귀한 시간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