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 근육

우리는 이미 근육부자입니다.

by 따름

아이가 어릴 때 기차를 참 좋아했습니다. 남자아이라면 기차를 좋아할 거라는 선입견 속에서 보여준 애니메이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아이가 좋아했던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동안 거실 한가운데 기찻길이 놓이고, 그 위를 달리는 기차가 우리 집의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정된 길 위에서 정해진 속도와 방향으로만 달리는 기차는, 아이의 흥미를 오래 붙잡아 두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늘 같은 길, 같은 속도, 같은 소리.


그래서 이번에는 스스로 길을 만들고 모양을 바꿀 수 있는 장난감을 함께 사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이의 흥미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엄마의 스트레스 해소용이자 육아 난이도 감소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쇼핑몰에서 원목 도미노를 발견했습니다. 동료의 권유로 구경 삼아 간 곳이었는데, 반품 상품이라 저렴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하면 재밌겠다, 혹여 흥미를 보이지 않아도 부담이 없겠다’는 마음으로 사 들고 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상자를 열자, 네모 반듯한 원목 도미노들이 주르르 맑은 소리를 내며 쏟아졌습니다. 노랑, 파랑, 연두, 빨강. 색깔만으로도 아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엄마가 시범을 보이며 조심조심 도미노를 세워보자고 유도하고, 바닥에 쏟아지며 맑은 소리를 내는 도미노에 깔깔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곧 아이는 그리 재미있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엄마가 좋아하니까, 엄마가 하자니까 하는 놀이였지요. 그러던 중 한참 집중해 도미노를 세우다가 살짝 건드려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자, 아이는 서러워 펑펑 울었습니다. 달래고 또 달래서 띄엄띄엄 세우는 요령을 터득하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도미노를 주르륵 넘어뜨리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꼭 중간쯤에서 유독 잘 넘어지는 조각이 있었습니다. 매번 그 녀석 때문에 아이의 도미노는 중간에 쓰러졌고,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 도미노는 구석으로 밀려나 먼지만 덮인 채 그렇게 잊혔습니다. 그저 아이가 도미노를 별로 안 좋아하나 보다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장난감을 정리하다가 그 도미노 상자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먼지를 털어내다 불쑥 삐져나온 한 조각 때문에 우연히 그때 왜 아이가 도미노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울면서 도미노를 포기했던 이유를요. 그 조각 하나의 바닥이 평평하지 않았던 겁니다. 살짝 기울어진 그 한 조각이 늘 중간에서 도미노를 계속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아무리 집중해서 세워 보아도 그 삐딱한 조각 때문에 완성을 못했던 것입니다.


도미노 놀이는 ‘내 손으로 마지막 조각을 넘어뜨려야’ 비로소 성공이라 부르잖아요. 누군가 옆에서 건드려 무너뜨리면, 그건 성공이 아닙니다. 공든 노력이 허사가 된 듯 허탈하지요. 게다가 우리는 도미노 조각 자체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내가 또 실수했네.” 대부분 그렇게 자신을 탓합니다.


그 도미노 이야기가 문득 떠오릅니다. 지금, 수능을 앞둔 아이를 보며 말이지요.


아이는 지금 자신만의 도미노를 세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루하루, 조심스럽게 한 조각씩. 그러나 ‘이제 넘어뜨릴 차례야’라고 마음먹은 그 순간까지 도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실수로 건드릴 수도 있고, 눈에 먼지가 들어가 깜박일 수도 있지요. 도미노가 무너지는 이유는 언제나 사소한 변수들입니다.

수능도 도미노 같습니다. 한 조각 한 조각 퍼즐을 맞추듯 최선을 다해도, 때로는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요.


하지만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도미노 한 조각은 얼마나 작고 사소한 것일까요. 멀리서 보면 작은 조각일지라도, 우리는 그 한 조각을 내려놓는 찰나의 순간에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합니다. 인생은 그런 진심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긴 선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니 저는 그 하나의 조각에 온 정신을 쏟았던 ‘마음 근육’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도미노가 무너졌다 해도, 그 마음 근육은 이미 단단해졌습니다. 다음에는 더 빠르고 더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입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는 ‘혹시 또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수능이라는 큰 일 앞에서는 별의별 변수가 생길 것입니다. 낯선 수험장, 다리 떠는 옆자리 빌런, 냄새, 감기, 코 고는 소리, 온도, 소음, 심장의 박동, 통제되지 않는 사지까지. 심지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화장실을 찾아야 하는 일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미리 염두에 둡시다. 그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잠시 삐끗해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제 11월. 고작 십여 일 남은 지금, 우리 모두의 마음 근육은 이미 충분히 단단해져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합시다.
“우린 이미 성공했다.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그간의 애씀을 함께 인정하는 시간.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수능 점수로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쌓아온 진심과 노력, 그 마음의 근육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미 근육 부자이니까요.


animal-6987017_1280.jpg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3화홈, 스위트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