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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 혐오자, 러닝을 시작하다

추첨은 실패, 그러나 달리기는 시작되었다

by 민송


"애들이랑 같이 디즈니 런 나갈래요?"

아들 친구 승민 엄마가 물었다. 디즈니 런이라면 마라톤? 나보고 마라톤에 나가자고? 승민이 엄마야 평소 달리기를 하지만, 난 한 번도 달려본 적이 없다. 애써 눈길을 피하려는 나를 그녀가 한마디로 잡아준다. "3킬로 밖에 안 돼서 애들도 충분히 뛸 거예요." 하하. 지호는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나. 일단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려본다.

보내준 링크를 열어보니, 보통 마라톤은 5km 아님 10km부터 시작인데, 디즈니 런은 가족을 위한 이벤트라 그런지 3km, 10km 비교적 짧은 코스로 되어있다. 사진 속 풍경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디즈니 캐릭터들도 함께 달리고, 메달에도 그 귀여운 얼굴들이 새겨져 있다. 마라톤이라는 과정과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는 건 아들에게 분명 좋은 경험이 될 터. 엄마의 욕심이 자극되는 순간이다. 날짜도 10월이니 두 달 정도 훈련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나도 완주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이 참에 달리기 한번 시작해 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결국 나는 엄두를 내어보았다. 아들과 함께 나란히 신청을 하고 대망의 추첨을 기다렸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 승민이네도 떨어졌단다. 요즘은 마라톤도 마음만 먹는다고 나갈 수가 없다. 선착순 아니면 추첨이니, 마우스 클릭 실력이 좋거나 운이 따라야 한다. 조금 아쉽지만, 운명인가 보다. 아직 아니야. 아직은 달릴 때가 아니야. 그렇게 도전 의지가 살짝 스쳐 지나갔다.


요즘은 SNS를 열면 여기저기 달리기 인증으로 가득하다. 친한 친구는 꽤 오래전부터 러닝 크루를 시작해서 마라톤에도 종종 나간다. 그걸 옆에서 쭉 지켜보면서도 달리고 싶다는 생각은커녕,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고만 느껴졌었다. 오랜만에 만난 민찬이 엄마도 최근에 러닝머신 위에서 뛰기 시작했단다. 글을 쓰며 만난,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도 러닝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다들 달린다. 낮에도 밤에도. 이렇게나 더운데.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가 좋아서 저렇게 달리는 걸까?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게 뭘까. 조금 궁금해졌다.


3주짜리 여름 방학. 첫 주가 끝나자마자 아들이 열이 났다. 심상치 않다 싶더니 독감이었다. 수액 주사를 맞고도 나흘간 오한과 고열에 시달렸다. 결국 나도 옮았다. 온몸이 아팠지만 약에 의지하며 버텼다. 우리는 일주일이 넘게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 갇혀 있었다. 전시회도 약속도 모두 취소. 그 시간, 습관처럼 켠 유튜브에는 러닝 영상이 계속 떴다. 러닝의 좋은 점, 러닝으로 달라진 삶, 그리고 Zone 2 운동이라 불리는 슬로우러닝까지.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한다는 그 운동이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온 우주가 나를 달리게 만들려는 것 같았다.


다섯째 날, 주사를 한대 더 맞고 나서야 아들의 열이 떨어졌다. 하지만 독감의 여파는 생각보다 길었다.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들은 기운이 없는지 자꾸 누워만 있었다. 안 자던 낮잠도 잤다. 며칠 더 쉬고 드디어 아들이 태권도에 복귀하는 날이 다가오자, 답답함이 극에 달했던 나는 달리기 생각이 났다. 달리면 나아질까? 숨이 차게 뛰면 이 답답함이 좀 가실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승민 엄마가 알려준 달리기 어플을 깔았다. 그리고 아무 운동화나 꺼내신고 태권도 가는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습하고 더운 여름밤. 초보자를 위한 8주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첫날은 5분 간 준비 걷기 후, 천천히 달리기 1분과 천천히 걷기 2분을 다섯 번 반복하는 훈련이다. 뛰기보다 걷기 시간이 기니깐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나를 응원하며 이어폰을 꼈다.


"곧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자, 천천히 달리세요."

아저씨 목소리에 맞추어 나는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차려나 싶은 순간, 1분이 끝났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 2분 동안 걸으며 숨을 고르고 다시 1분을 달리기. 땀이 나기 시작하자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았다. 다섯 번의 달리기를 마치고 5분의 걷기를 하며 첫날 훈련을 마쳤다.




짧디 짧은 1분이었지만, 그 다섯 번의 1분이 내 안에서 작은 불씨가 되었다. 달리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숨이 차고 땀으로 흠뻑 젖은 내가 이상하게 마음에 든다. 다리는 무거웠지만 마음은 상쾌했다.

이렇게 나의 달리기는 시작되었다. 이 작은 불씨가 어디까지 번질지 아직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이제 뛰러 나가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 이 설렘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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