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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러닝화가 필요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달려

by 민송


그날도 어김없이 런데이 아저씨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집을 나설 땐 한없이 무거웠던 다리가, 뛰기 시작하니 조금씩 가벼워졌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 쉬지 않고 얼마나 달릴 수 있을까?"


처음으로 코치 아저씨의 말을 거슬렀다. "자, 이제부터는 빠르게 걸으세요." 하지만 나는 걷지 않고 계속 달렸다. 힘들면 속도를 줄이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25분을 전부 달리기로 채웠고, 탄력 받은 김에 5분을 더 뛰었다. 결국 30분 달리기를 해냈다. 나의 페이스대로.


신이 난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현관문을 열며 큰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여보, 나 쉬지 않고 30분을 달렸어! 대단하지? 이제 러닝화를 사야겠어. 나 러닝화 좀 사주라."

남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있는 돈은 여보 다 줬는데, 이러시면 안 되죠."

빈 말이라도 "그래, 사러 가자" 한마디만 하지. 남편이 끼얹은 찬물에 입이 살짝 나오긴 했지만, 재빠르게 수긍했다. 사지 말라고 한건 아니니까.

"그래. 그럼 나 러닝화 산다. 알아서 좋은 걸로 살게'

사실 달리기 시작 전부터 러닝화 검색은 이미 시작되었다.

'안정화가 좋을까? 쿠션화가 좋을까?'

또 시작이다. 뭐든 완벽하게 시작하려는 내 버릇. 분명히 조금 다르게 살아보자 다짐해 놓고, 또 이러고 있다. 어차피 쭉 달리지도 못할 거, 걷다 뛰다 할 텐데. 얼마 못 가서 그만둘 수도 있고. 그렇다면 아무 신발이나 신어도 되지 않을까.


집에 있는 운동화를 꺼내보았다. 검색해 보니, 러닝용은 아니지만, '러닝 감성'을 살린 운동화란다. 일단 이거면 되었다. 완벽한 세팅을 향한 욕심을 내려놓으며, 나는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2주 뒤,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다. 러닝화를 사러 가기에 완벽한 타이밍!


하지만 쇼핑이 어려운 나에게 러닝화 장만은 또 하나의 산이었다. 매장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먼저 다가와주는 점원이 있길 바랐지만, 매번 빈손으로 돌아왔다. 결국 러닝을 시작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어서야, 나의 첫 러닝화를 만났다.


새 러닝화를 신고 달리니 처음엔 어색했다. 쿠션감 때문인지 발이 통통 튀는 듯했고, 착지도 달라진 것 같았다. 달리는 중에도, 그리고 달리고 난 뒤에도 다리 뒤 쪽이 유난히 뻐근했다.

'적응 중이겠지.'

어플에서 배운 자세를 고집하다가, 어느 순간 의문이

생겼다. 몸이 편안한 자세가 답이 아닐까. 그렇게 나와 러닝화는 조금씩 서로에게 맞춰졌다. 열흘쯤 지나자 처음의 어색함과 불편함은 사라졌다. 좋은 러닝메이트를 얻은 기분이다.


달리다 보면 여러 유형의 러너들을 만난다. 나처럼 천천히 달리는 사람도, 멋진 폼으로 달려 나가는 전문 러너도 있다.

'저렇게 입고 뛰면 되는구나. 와, 멋있다.'

내 눈을 사로잡은 여성 러너들. 군살 없는 탄탄한 체형, 심플한 복장, 러닝화와 장비의 조화. 그런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욕심이 쓰윽 올라온다.

"나도 저렇게 입고 싶다. 저렇게 뛰고 싶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모습으로 시작하기로 했으니, 욕심은 잠시 넣어두자.


"있는 옷 입고 달려. 와치도 없어도 돼."

필라테스 옷 중에서 치렁치렁하지 않은 것으로 골라 입고, 스포츠 양말 따윈 없으니 일반 양말을 꺼내 신었다. 러닝화 아닌 일반 운동화를 신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달리는 사람'이 되어갔다.


걷기만 해도 땀이 흐르던 여름밤에 시작한 달리기가, 이제 가을을 찍고 겨울로 접어든다. 밤공기가 차가워지며 벌써 손과 귀가 시린다. 더 추워지면 밤 러닝을 낮으로 바꿔야 하나. 계절이 바뀌니 확실히 필요한 것들이 생긴다. 겨울 러닝 용품을 보다 보니, 차라리 헬스장 등록이 더 경제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바깥에서 달리는 이 느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일단 꼭 필요한 장갑과 헤드밴드, 따뜻한 조거팬츠와 가볍고 보온성이 좋은 아우터까지 하나씩 준비해야겠다. 아웃렛과 세일하는 매장을 돌며 조금씩 장비를 채워가는 중이다.


달리기 시작한 지 백일. 이제 진짜 달릴 준비가 되었다.

여전히 와치는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꾸준함이 있다.

이제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릴 일만 남았다.


달리다 보니 깨달았다.

결국 필요한 건 새 러닝화가 아니라, 달리고 싶은 마음과 "오늘도 잘 뛰고 왔어?" 하는 그 한마디였다.

그래도 좋은 러닝화는 하나쯤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그가 같이 뛰어주는 남편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흔쾌히 사라고 말해주는 남편이라, 이 또한 다행이다.


남편이 안 뛰어주면, 혼자 뛰지 뭐.

아님 아들이랑 뛰어볼까나.

그런 날이 오면, 내 달리기는 또 다른 시작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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