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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당신아. 이제는 나를 두 번 다시 떠나지 말아 주어. 내게로 돌아왔으면 자리를 잡아주어. 내가 앞으로도 당신의 안에서 살 수 있게. 더 좋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게. 내가 당신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전까지는 나의 옆에서 날 사랑해 주어. 지금까지 그래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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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된 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비가 수도 없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신발 바닥에 껌이 쩍 하고 달라붙은 재수 없던 날. 나 오늘 운이 없으려나 봐. 하는 나의 우스갯소리에 아무 말 않던 은혁. 그 대신에 늘 한결같이 띄우던 울음기 가득한 미소를 보였던 그날.
처음의 충격은 온데간데없고, 익숙함만 남은 빗소리들 사이에서 검은 우산 밑으로 그림자 지던 은혁의 입꼬리. 어느 지점에서 헤어져야 하는 때에 저는 괜찮다며 소낙비 속으로 뛰쳐들어가던 뒷모습. 내 손에 쥐어진 검은 우산. 그리고 나의 앞에서 물이 흘러내려 가듯 사라져버린 은혁의 뒷모습. 그와 동시에 울리던 시끄러운 차의 네 바퀴 소리. 어떤 육체가 부딪히던 소리. 여전히 내 손에 쥐어진 검은 우산. 빗물과 섞여 아스팔트 바닥에 번져가던 은혁의 진한 것. 그걸 바라보던 나와 어쩔 줄 몰라 하던 차량의 주인. 119 불러야지 뭐하고 앉아있어 병신아!!! 하고 소리치던 조수석의 여자.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던 나. 그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쳐다도 보지 못하게 된 검은 우산.
형사였던 탓에 좀처럼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은혁의 아빠는 제 성대를 금방이라도 찢어버릴 기세로 은혁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렀다. 처연하고 처절한 아버지의 모습이란 남의 동정을 사기에는 충분했고, 그것을 지켜보던 은혁의 친구라는 작자들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물범벅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혁아, 은혁아. 아들아. 아이고, 내 아들. 장례식장 내 그 목소리 외에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를 사고로 떠나보낸 후 유일하게 의지해오던 가족마저 떠나보낸 아버지의 심정을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도 충분히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미 죽어서 다 태우고 가루 돼 버린 걸 어떡해. 이미 다 쉰 목소리로 불러보았자 아들이 돌아오기라도 하나? 그렇게 흥건하게 흘렀던 핏바닥이 다시 모아지기라도 하나? 강은혁은 이미 죽었다. 그의 사진 앞에서 울고불고 빌빌 기어도 그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저렇게 바퀴벌레처럼 바닥을 쓸고 다닐 작정인가? 넙적 엎드려 땅바닥을 치며 제 웃옷이 올라간지도 모른 채로 절규하는 강함섭의 모습은 마치 노비가 쫓겨나 빌빌 기는 모습과 다름없이 보였기에 나는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새카만 치마를 입고 구석에 힘없이 떨궈져 앉은 채 울렁이는 목울대를 진정시킬 수 없어 날카로운 소리로 쉼 없이 웃었다.남들이 나의 그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강은혁은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하라고. 이미 죽은 사람을 무슨 수로 다시 깨우라고. 이미 죽은 강은혁을. 내 눈앞에서 죽은 은혁이를. 내 은혁이를. 그렇게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짓거리 내가 이미 해 봤는데, 그렇게 해도 걔 안 돌아오던데. 비가 오던 그날 피가 빗물과 섞여가던 바닥에서 수도 없이 기었지만, 죽은 숨은 안 돌아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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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다는 건 뭘까. 그게 너의 최대 관심사. 은혁은 제 엄마가 사고로 죽고 나서부터 불행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고 곧잘 떠들어대고는 했다. 수십수백 번 했던 이야기를 기억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어야만 소화가 좀 된다나. 쓰디쓴 위액을 뱉어낸 후처럼 그의 속이 쓰릴 때마다 늘 치료제 역할을 하는 건 나였다. 한솔아. 네가 없는 게 나한테는 불행인 것 같아. 그의 불행은 늘 그렇게 결론 내려지곤 했으니 말이다. 그는 그런 말이나 행동을 잘 하지 않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은혁의 그 말을 얼마나 간직하고 싶었을지 이제는 알 것이다.
은혁에게 우울증 같은 건 없었다. 제 엄마가 죽고 나서도 울음 같은 것 하나 없었다. 무의식에 엄마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중일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도 이미 엄마가 죽은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런 말 안 하셔도 된다는 대답을 끝으로 자리를 뜨는 사람이었다. 그때처럼 추적추적 비가 오던 날, 나와 함께 검은 우산을 쓰고 걷다 어느 지점에 멈추었을 때 보이던 아스팔트 위 하얀 사람 모양 테두리. 그게 제 가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가 꽤 빨리 달렸나 보네, 여기 어린이 보호 구역인데. 나른한 한마디를 하곤 다시 찰박이며 추우니 데려다주겠다 말하던 그였다.
그에게는 회피하고자 하는 문제도 없었다. 얽혀있는 채무 관계라든지, 더러운 전 여자친구 또는 섹스 파트너라든지, 끈질기게 유산을 원하는 가족이라든지. 그에게 진한 관계란 강함섭과 내가 유일했고, 그것에 문제는 없었다.
이제 다시, 불행하다는 건 뭘까. 그게 너의 최대 관심사. 너의 불행은 어쩌면 내가 너의 눈앞에서 생명을 가진 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도. 내가 떼는 한 걸음, 들이쉬는 너의 숨. 딛는 걸음, 내쉬는 너의 숨. 그것이 탁한 빛을 뿜어내는 걸 두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너의 불행함을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래서 이루어진 첫 번째 극단적인 행위. 왜 그랬냐는 나의 물음에 ‘몰라.’하고 답하던 너의 철없는 웃음기에 결국 나도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었다.
은혁아, 불행하다는 건 뭘까. 이번엔 선수를 친 내 물음에 그가 답했었다. 모르겠어, 이제 다시 생각하고 싶어. 그에 또다시 내가 답했다. 난 네가 없는 게 불행인 것 같아. 그때 그는 웃었다. 나는 속으로 악한 생각을 했다. 내가 왜 너의 불행이냐고? 난 네가 원하는 대로 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근데, 정말, 불행하다는 건 뭘까. 내가 생일 때 선물해 준 퍼즐을 가장 좋아하던 그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세 손가락으로 굴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의 그 질문. 잔잔하던 분위기를 깨기에는 충분하게 들렸기에, 나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다 말고는 그에게로 짜증 담은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어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듯 턱을 괴고서는 매일이 당연한 질문인 듯한 모습. 이젠 질문의 대상이 내가 아닌 것 같은 모습.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모르게끔 만드는 저 얼굴과 표정, 몸짓. 그러나 나는 여전하게 대답했다. 말했잖아. 난 네가 없는 게 불행인 것 같다고. 그러자 너는 한참을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한솔아.
응.
너와 내 불행은 두 조각짜리야.
무슨 뜻이야?
….
….
근데 나한테는 세 조각짜리 불행이 또 있어.
….
너한테는 몇 조각이나 있을까.
이해가 안 돼.
아냐.
그가 맞춘 것은 과연 퍼즐이 맞을까?
아니면,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불행의 조각?
몸에 흉터 하나 없는 그의 나체 위에 얹힌 두툼한 이불을 가끔씩은 질투도 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온통 그를 휘감아 싼 그 이불을 은근슬쩍 벗겨냈을 때 그가 부리던 응석을 미워하기도 했다. 나와 그의 사이를 가로막아버린 티 없는 흰 천이 가끔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빨래하려고 내놓았다는 핑계를 대고 밖에다 내다 버리듯 해놓으면 그는 다른 것을 꺼내와 꾸역꾸역 덮었다. 그게 습한 기운을 가지고 있든지 말든지 말이다. 괜스레 엉덩이를 걷어차면 장난스럽게 시원하다고 더 해달라던 그의 철없던 목소리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어하던 목소리였다. 이 모든 게 나로서는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난 나름대로 따스한 몸으로 그를 안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에게 전해진 것이 온기 아닌 괴로운 한기였다면. 그래서 그가 만약 속으로 나의 그 점을 미워하고 염오했다면. 그게 그에게는 고통이자 우리 불행의 사소한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생일이 비밀번호였던 휴대전화를 앞에 두고 끝도 없이 울면서 문득 떠올렸다. 그게. 그게 너와 나의 진정한 시작인 것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그 이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야.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잊힐 네 얼굴 모양새로 열리게끔 해놓는 잔인한 짓을 벌이고서 너는 그렇게 떠났다. 나와 네 얼굴이 다른 것처럼, 우리 불행의 모양새가 다르다고 말하는 듯이. 넌 마치 네 조각이 더 큰 양 나를 놀리고 또 한 번 더 우롱했다.
그가 왜 불행을 조각에 비유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의 생각 속 불행의 크기는 가장 좋아하는 것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의 불행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는 너를, 그리고 숨이 붙은 채 홀로 살아 숨 쉬는 나를 이제는 누가 책임져줄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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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울대가 울렁이며 음절들이 차례대로 식도를 타고 흐른다. 씨발, 너 그때 의사한테 네 엄마 죽은 거 안다며. 입속에서 달게 맴돌던 말을 억지로 삼켜내는 건 아무리 견뎌봐도 고역에 가까웠다. 얼른 위 속에서 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토하고 싶었던 걸 겨우 막았다. 지금의 은혁을 바라보다 보면 정말이지, 좋은 말 예쁜 말이라는 게 무엇인지 잊힐 정도다.
나는 외롭게 앉아있었고 그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 느릿느릿한 손놀림으로 휴대전화 갤러리를 훑어보고 있었다. 강은혁. 나의 부름은 벌써 다섯 번째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그는 넋을 놓은 채 그저 엄지손가락만 위아래로 움직일 뿐이었다. 날이 많이 추워졌다. 그만큼 이불의 두께도 두터워졌다. 이젠 엉덩이를 걷어차도 그는 아무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심히 언짢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나의 보살핌이지 이딴 천 쪼가리의 포옹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밖에서는 굵고 무거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도 않는 사람이 이런 날 나갈 리가 없다는 건 안다. 그런데, 오늘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네 엄마의 제삿날이라는데. 이렇게 누워 돌아오지도 않을 사람의 사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야 그녀가 돌아오기라도 한다니? 제발 쳐 일어나, 그 마른 몸으로 계속 스스로를 망가뜨려 뼈만 남겨버리기 싫으면. 그냥, 제발 좀 일어나면 안 되겠니. —— 나의 생각에 힘입어 늙어 빠진 강함섭에게서 온 전화. 야, 저기. 은혁이는 언제 온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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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은혁이, 자기가 스스로 차에 뛰어든 거예요.
제가 블랙박스 확인했어요.
나는 기다란 쪽지가 꾸깃해질 때까지 쥐락펴락 만지며 함섭에게 참담한 소식을 전했다. 그와 나 누구에게 더 아픈 소식인지는 알 수 없다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그의 충격에는 가히 공감할 만했다. 나의 상태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몇 주간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에 나의 눈은 붉다 못해 시뻘겠다. 씻다 못해 물로 몸을 삶아 부르틀 정도였으며, 먹는 건 당연하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몸무게는 무려 6kg이나 감소했다. 이 모든 게 단 한 사람, 자살한 강은혁 때문이었다.
아직도 생생한 휴대전화 영상 속 은혁의 모습이 나의 심장을 흉기로 콱콱 찔러버리는 듯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과, 처절한 빗소리와, 휙 뛰어든 커다란 육체와 비명이 저절로 감각을 스친다. 순간 숨이 딱 멈춰 어쩔 줄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꾸깃해진 종이를 더 구겨버리는 반사적인 행동 말곤 없었다. …또 연락드릴게요. — 전화가 끊겼다. 그와 동시에 쥐어졌던 주먹이 스르르 벌어진다. 틈으로 보이는 흰 종이엔 검은 글씨가 비쳤다.
글씨가 번진 이유가 마르지 않아서인지 눈물에 젖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점은 이 쪽지 속 글씨는 확실히 은혁의 손글씨라는 것, 또 이 글 자취를 남긴 펜은 그가 가장 아끼던 젤잉크 펜이라는 것.
글은 세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불행의 두 조각을 말하고 있었다.
‘너는 내 불행 세 조각을 알 수 없어. 내가 너의 불행이 몇 조각인지 알 수 없듯이. 그게 너와 나의 불행인 거야.’
너도 결국 네 엄마처럼 갔구나.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 강은혁은 제 엄마처럼 차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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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혁아, 있잖아. 불행하단 건 뭘까. 너를 만나면서 수도 없이 생각해왔던 질문이야. 불행이라는 건 당연히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 그런데 내가 말하는 불행이란 너와 나의 것을 말하는 거야. 네가 죽을 때까지 알려주지 않았던 우리 불행이 과연 뭐였는지, 난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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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불행은 우리였지? 그래서 두 조각이라고 한 거지? 네가 내 불행이고 내가 네 불행이라서. 너, 나한테 뭔가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죽어버린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으니까. 나는 널 정말 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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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나한테 네가 겪은 똑같은 일을 그렇게 무단으로 투기하고 가면 어떡하라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엄마 죽은 네 입장이 되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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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네 마지막 선물이라면 내가 누군가에게 이걸 줘버리기 전까지는 그 안에서 살 거야. 그리고 네가 사랑했던 것처럼 나도 사랑할 거야. 오기로라도 사랑할 거야.
….
네가 나한테 이딴 식으로 준 것 때문에라도.
나는 너의 자살을 결국 알아채고 말았다. 네가 나에게 네가 겪은 불행 그대로를 떠넘기고 떠날 줄은 몰랐다.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을 누군가에게 표현할 길이 없어 네 유골함 앞에서 할 수 있는 전부의 기도를 했다. 너에게 전해졌을까. 그렇다면 너는 지금 어떤 얼굴일까. 죄책감이 가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의외이진 않다.
집에 돌아가는 강함섭에게 전화를 했다. 아들이 죽고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듯했던 그는 분명 오늘도 술을 마시느라 전화를 받지 않을 테지만, 혹시나 해서. 나는 전화를 한 번 더 걸었다. 이번엔 대화의 목적보단 연결음이라도 듣기 위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받지 않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니 연결음조차 없는 적막 속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부는 바람을 타고 뼛가루가 날리는 것만 같다.
원하지 않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은 네가 늘 쓰담아주던 뒤통수에, 그다음 두 방울은 하늘을 올려다 본 내 눈망울 위에. 그러더니 곧 볼과 머리칼에, 어깨에 앉는다. 사정없이 엉덩이들을 갖다 대는 것이, 어찌 그리 뻔뻔한지. 그날 이후 우산을 잡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알고서는 비를 마구잡이로 부어버리는 강은혁이 미워, 나는 오기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때리는 물줄기에 잘게 깜빡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 역시 인정사정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은혁 이 개새끼야!!
슬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빗줄기는 더 거세졌다. 마치 나에게 쓰러지라고 강요하듯. 하늘에서로부터 날 강하게 짓누르고 싶어하는 것 마냥.
나는 힘 빠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억, 무엇인가가 목을 치고 올라와 구역질하고 만다. 오른쪽 눈물샘이 눈물을 왈칵 하고 토해낸 것이다. 다시 한번 억, 하고 구역했다. 왼쪽 눈물샘에서. 또 다시 억. 이제는 양쪽에서 뜨거운 것이 볼을 주르륵 탔다. 그때부터 시작된 건 겉잡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엉엉 울었다. 정말 말 그대로 엉엉 울었다. 참아왔던 것들이다. 불행이고 뭐고, 그런 것들의 정의하지 않은 채 나에게 불행 한 가지를 물었을 때 할 수 있는 답은 네가 없다는 것인데. 너는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불행이 뭔지 한참을 고민하며 결국 나한테 모든 걸 안겨주고 떠나버리고 말았다. 내가 더러운 빗물과 섞인 피를 기어코 보게 만든 네가 너무 싫었다. 이렇게 비가 오고 머리칼과 옷이 다 젖는 날이면 몇 번이나 네가 차에 치이는 모습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나는 그렇게 만든 너를 아직도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울고 또 반쯤은 돌아서 지금처럼—.
주저앉은 나의 다리 양옆으로 빨간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 같다. 그때도 이랬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구겨진 그의 몸 사이로 이런 핏물이 배어 나왔었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이, 안 된다는 말을 몇 번이고 앓아가며 뱉는다. 나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음성으로 은혁의 이름을 그리듯 불렀다. 엉엉 울었다. 눈이 찌릿거리고 쓰라렸다. 핏물이 시작된 지점을 천천히 어루만지자 그것이 조금씩 아른거렸다. 아주 느리게, 나는 오른손을 딛는 동시에 왼 무릎을 아스팔트 바닥에 쓸었다. 바지에 상처가 나는 것이 느껴지지만 버리면 그만이다. 왼손을 딛는 동시에 오른 무릎을 바닥에 쓸었다. 왼손에 날카로운 돌멩이가 닿은 것이 느껴지지만 방치하면 그만이다. 더 볼 것도 없다.
나는 그대로 기었다. 바퀴벌레처럼 기었다. 장례식장에서 내가 비웃었던 강함섭의 모습과 다를 것 없이 똑같이 기었다. 그에게 돌아오라고 빌었다. 비명을 지르고 빌었다. 화장 당해 뼛가루가 돼 영혼이 죽어버린 강은혁에게 빌었다. 네가 불행을 수백수천 번, 아니, 그 이상 외쳐도 좋으니 돌아오라고 빌었다. 젖은 머릿결이 앞으로 쏟아져 무겁게 찰랑거린다.
은혁아, 은혁아. 은혁아. 은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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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솔. 나의 부름은 벌써 다섯 번째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나의 딸은 넋을 놓은 채 그저 엄지손가락만 위아래로 움직일 뿐이었다. 날이 많이 추워졌다. 그만큼 이불의 두께도 두터워졌다. 이젠 엉덩이를 걷어차도 딸은 아무 느낌을 받지 못하는 듯 보였다. 나는 심히 언짢다. 딸에게 필요한 건 나의 보살핌이지 이딴 천 쪼가리의 포옹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밖에서는 굵고 무거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도 않는 애가 이런 날 나갈 리가 없다는 건 안다. 그런데, 오늘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네 애인의 제삿날이라는데. 이렇게 누워 돌아오지도 않을 사람의 사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야 은혁이가 돌아오기라도 한다니? 제발 일어나, 그 마른 몸으로 계속 스스로를 망가뜨려 뼈만 남겨버리기 싫으면. 그냥, 제발 좀 일어나면 안 되겠니. —— 나의 생각에 힘입어 은혁의 아빠에게서 온 전화. 예, 저 은혁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한솔이는 아직 오려면 멀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