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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세요, 나를 죽여주세요.”
붉은 것이 부드러운 살결을 타고 흘러 바닥을 적신다. 팔에 생긴 무수히 많은 선은 심한 난도질의 증거였다. 화장대 위에 떨어진 피 묻은 날이 사납게만 느껴진다. 지저분하다고 느낄 만큼 흐린 거울에는 눈코 입도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붉은빛 물만은 선명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비친다.
“절 죽여주세요.”
이 말을 외친 지도 수백수천 번이다. 더 이상의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에 거울 너머의 누군가와 계약을 맺는다. 일종의 강령술, 아니. 자기 저주에 가깝다. 눈에서는 피 같은 눈물이 흐른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더러운 거울 속 나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이렇게 해야 해. 그래야 누군가가 나의 목을 졸라줄 거니까. 꿈에서든, 아니면 현실에서든. 다시 한번 외친다. 나를 죽여주세요. 나를 죽여주세요.
가장 보기 싫은 빛이 한 줄기 새어 나온다. 그 문의 틈으로 들어오는 발 하나에 칼을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나는 애를 먹는다. 그가 내게 다가온다. 그는 유했다.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놀라지 않았다. 목을 매달아도, 방 안에서 울며 소리를 질러도, 지금처럼 피를 쏟아내더라도.
악에 받친 채 비명을 지른다. 한 번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 또, 또다시, 그리고 또다시 지른다. 그러자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서는데, 그림자가 진 탓에 꽤 어둡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만은 또렷하게 보인다. 표독스럽게, 잡아먹을 듯이 그를 바라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는 눈빛뿐이다. 정말이지, 그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잘난 발등에 칼을 꽂고 싶었다. 그것뿐일까, 그대로 앞으로 쫘악 그어 두 동강 낸 후 소의 뼈를 잘라내듯 뼈를 다져버리고 싶었다. 그 정도로 나는 그가 밉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하고, 그게 그였으면 할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를 해할 용기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 대상은 내가 되고 만다. 나는 더 나를 해한다. 더, 더. 더, 더. 피가 번지는 속도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다. 그는 나를 말렸다. 유인, 그러지 마. 그러나 내가 그 말을 들을 리 없다. 나는 괴롭고, 외롭다. 모든 건 다 그 때문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안에는 사랑이란 게 없었다. 그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결국에 난 그를 사랑할 것이기에, 더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끔 그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싫었다. 개새끼, 죽일 놈, 병신, 머저리 같은 게.
그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 중 하나였다. 누구보다 사탕발림을 능숙하게 하는. 그것을 입에 달고 살면서 누군가를 홀리고, 헤어 나올 수 없도록 가둔 채 방치하며 정신적 고문을 가하는 최악의 인간. 그의 달콤한 말이 진짜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을 테다. 우선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한들 이제 와 달라지는 건 없다. 그를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 전부가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하는 정신적인 고문은 굉장히 괴롭고 힘든 것이라, 견디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미래이기도 하다. 나는 자기 저주를 여러 차례 해왔고, 그것이 날 죽음으로 이끌 테니 말이다. 나의 소원은 이 집에 자살귀로 남아 그를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것이다. 내가 죽는다면 그는 울겠지. 나를 그리워하겠지. 내가 남긴 유서를 보고 그는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상상하면 나는 되려 행복감에 잠긴다. 당연하다. 나는 그의 불행을 사랑하고, 아마도, 지금처럼, 지금보다 격하게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말이다. 그 역시 나의 불행을 사랑하기에, 기브 앤 테이크.
그는 어느새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걸 안 이상 나의 눈이 더 표독스러울 이유는 없다. 나는 눈물을 그쳤다. 더 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는 떠났고, 난 혼자니까. 칼을 바닥에 던졌다. 흐른 피는 전부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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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굳은 피를 씻어내는 일이었다. 아픈 줄 모른다는 건 전부 거짓말이다. 미친 듯이 쓰라려 주먹을 꽉 쥐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는 뜻이다. 수건으로 물을 흡수시킬 때도 매우 따가워 ‘쓰읍’ 소리가 잇새로 흘렀다. 미처 다 잠그지 못한 수도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쳐 끈다. 열받아 죽겠는데, 지랄이야. 씹것이. 나는 존재하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잔뜩 화나 있었다. 비교적 깨끗한 욕실의 거울 속 내 얼굴은 세상의 어느 얼굴들보다 가장 더러워 보인다. 분명 어제저녁 감은 머리가 너무나도 기름져 보이고, 얼굴엔 더러운 것이 묻어있는 것 같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선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늘 그런 강박적인 샤워를 했으니 어색해할 것도 없었다. 옷을 대충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 얼굴부터 적셔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박박 문지른다. 머리 역시 손톱을 세워 두피가 뜯어질 정도로 세게 긁는다. 바닥으로 흐르는 물은 던져진 옷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붉게 물들어가는 내 몸이 상상되어 징그러움에 몸부림쳤다. 내가 원하는 나의 붉은 몸이지만서도.
축축하게 젖은 발을 바닥에 내딛자 내 앞을 무엇인가가 가로막았다. 키가 나보다 10센티미터 정도 큰 남자, 남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 외출복, 흰색이었던 구멍 난 양말, 핏줄이 도드라져있던 손등과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의 끼워진 살아남은 반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였다.
유인. 그가 나를 불렀다.
입 닥쳐. 나는 그의 부름에 대꾸하고는 그를 지나쳐 안방으로 향했다. 그가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좋지 않았다. 길고 축축한 머리가 날 괴롭혀서 얼른 말리고 싶었다. 그것을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수건으로 감싸 올린 머리를 풀어 내리자, 그 끝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드라이기를 집어 들고 코드를 꽂자, 그가 내게 다가온다. 다시 내 이름이 불린다. 유인, 유인.
“제발, 제발. 제발!”
조금도 머리에 닿지도 않은 드라이기에서 왜인지 탄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나의 눈이 그에게 향할 때, 더욱 그렇다. 그의 얼굴은 매우 슬퍼 보인다. 얼굴에는 오래된 눈물 자국의 흔적이 보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저 새까만 피부가 지닌 흔적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가 다시 말한다. 유인, 유인. 이번엔 대꾸를 않았다. 그러자 그가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데.
“싫어!”
그를 세게 밀친다. 그게 먹혔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 모습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나는 다시 화장대로 몸을 돌린다. 모른 척해. 모른 척해. 그냥 눈을 닫아버려.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드라이기를 가장 세게 틀어버린다. 젖은 머리칼은 무거워서 바람에 날리지도 않는다. 물이 뚝뚝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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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활활 타오르는 무언가를 보고서 깨어난 나는 나의 옆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그를 보고 육두문자를 내뱉는다. 그것은 그를 향한 원망의 부름이다. 나 대신 먼저 간 그를 향한 원망의 부름이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유인. 내가 답한다. 닥쳐.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는 이걸로 끝이다.
욕실의 거울은 나의 얼굴을 잔뜩 더러운 모양새로 보이게끔 했다. 분명 저녁에 씻었는데, 시꺼먼 것이 여기저기 묻어있고 머리칼은 그을린 듯하다. 날이 갈수록 이것들이 심해져 나는 발끝부터 희미해져 가는 나의 존재를 느껴야만 했다. 샤워기의 물을 튼다. 이제 그것이 피가 흩뿌려지는 듯한 환시로 나타난다. 바닥의 흐르는 것이 피 ‘같다’는 둥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은 곧 투명한 물의 색으로 변한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하마터면 뒤로 자빠져 쓰러질 뻔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현기증이 난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금 신경질을 부렸다. 애꿎은 세면대는 어느 부분에 금이 가 있었다.
분명 나는 물로 온몸을 세척해 내듯 하고 있는데, 몸의 어딘가가 불에 타는 듯이 아파져 나는 고통에 찬 신음을 뱉었다. 한두 번이 아닌 격정적인 나의 몸짓과, 미친 듯이 웃고 우는 것과,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낀 것이 벌써 1년 반째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빌 것이다. 죽여주세요, 나를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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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그였다. 나의 평생을 다 주고도 남을 그였다. 나는 이 한 몸 사리지 않고 그의 모든 것에 던져 언제나 그를 나의 보호 아래 두었다.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쳤고, 그것은 내가 첫 번째로 경험한 진정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나의 그런 열정적 사랑을 받고서도 왜, 나를 두고, 아니 어쩌면 원하길 나와 함께 떠나려고 했던 걸까. 늘 잠들기 전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되새김질한다.
우리, 그냥, 같이 죽자.
뚝, 뚝, 지저분하게 끊긴 말에 얼마나 소름이 오소소 돋았는지 모른다. 싫어. 왜? 내가, 내가 먼저 죽어야지. 그리고 너는 평생 나를 잊지 말고 살아야지. 나 너한테 복수할 거야. 나의 불안감 잔뜩 담긴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제 몸에 기름을 콸콸 끼얹었다. 아니야, 하지 마!! 아무리 밀쳐내지만, 그는 뒤로 나자빠질 뿐, 몸에 그 미끈거리는 액체를 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코와 눈과 입에 잔뜩 머금어졌을 텐데. 내가 미워하고 사랑하는 그가 이렇게 죽는 건 말도 안 돼. 그러나 곧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라이터는 그의 손끝으로 향하고 만다. 나는 공포심에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를 말리느라 손에 잔뜩 묻은 기름 탓에 내게 불이 옮겨 붙어 버릴까 그랬다. 같이 죽긴 싫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나를 그리워할 수 없기에 그렇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소리가 불길하고 불결했다. 그걸 뚫고 들리는 아주 고통스러운 비명은 내가 공황 상태에 빠지게끔 했다. 새까맣게 변한 그를 나는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덜덜거리는 손을 멈추지도 못한 채 휴대전화를 들어 119에 신고했다. 도와주세요, 남편이 자기 몸에 불을 질렀어요.
영정사진마저 준비되지 않아 대충 예전에 찍어두었던 셀카 중 그의 얼굴만 자른 사진을 세워두었다.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나른한 사진 속 얼굴은 그것을 바라보는 듯 보였다. 나를 따라 열리기 시작하는 향의 길과, 셀 수 없이 많이 놓인 흰 국화꽃, 그리고 그중 내 것은 없는 것. 모든 게 날 멍하게 만들고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의 회사 동료들이 눈물을 잔뜩 머금은 채로 내게 다가온다. 아주 힘드시겠어요.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네.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왜 죽었을까. 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을까. 내가 뭘 어쨌다고. 그가 힘들다며 그만하라고 했던 것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을 거라고 수도 없이 말하던 내 말과 그의 앞에서 행한 자해뿐인데. 그것마저 그가 나에 대한 사랑을 보이지 않았기에 대가를 치러 준 것뿐인데. 모든 짐을 왜 내가 짊어져야 하는지?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나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3일 내내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을 짓는 이들을 바라보며 솟아오르는 죄책감을 억눌러야만 했다. 내가 왜 그것을 느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울었다.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3일 내내 밤마다 울었다. 그는 최악의 감정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죽음을 택했다. 내가 그것을 느끼길 원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미웠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은 자살한 그의 탓이었고, 그것은 곧 분노로 탈바꿈했다. 그는 과연 저를 죽어라 미워하는 날 보며 자기 죽음을 후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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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 죽음을 후회한다고 했다. 이건 내 눈앞에 새까매진 그가 나타나서 한 말이며, 지금부터 서술하는 모든 것엔 거짓이 없다.
장례식이 끝난 후 어떠한 존재도 있지 않은 그 집에 도착하고 나니,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거라. 한 발짝을 내디디면 묻어있는 증오의 기억들이 몸을 관통해 보이지 않는 혈이 줄줄 흘렀다. 그리고 그 빈 곳엔 피를 대신해 염오감이 몸속에서 돌았다. 가슴팍에서부터 시작되는 떨림은 이내 목으로, 어깨로, 허벅지로, 그 끝까지 펼쳐나간다. 조영제라도 투여한 듯 몸이 뜨거워지는 동시에 속이 울렁였다. 침대에 도달하기까지는 무려 5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울며 그의 흔적을 그리워해 보고, 그와 함께 한 공간을, 바닥을 전부 그리워해 보다 정신을 차리니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있었던 것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그 집에 남은 거라곤 끝만 살짝 그을린 침대뿐. 그곳에 누운 순간부터 나의 눈에는 그와 함께 시간을 나누던 환상이 그려졌다. 그가 내게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그대로 잠에 빠져서 눈을 떴을 땐, 며칠이라도 지난 듯이 느껴져 가슴 한편에 찜찜한 기분만이 남았다.
언젠가부터 무언가의 시선을 느끼던 나는 밤잠을 설쳐가며 보초를 서듯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다가도 눈을 번쩍, 머리맡 창문 너머로 느껴지는 불쾌함에 펴질 일 없던 미간을 훨씬 구기며 밖을 노려보길 수십 번. 자아를 가진 바람이 쌩쌩 쏘다니는 듯한 기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문의 존재는 나의 눈에 띄지 않았고, 알 수 없는 나는 깊은 스트레스 탓에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타이레놀 같은 진통제도 소용이 없을 정도인 거라. 어느 병원을 가더라도 정신과에 방문해 보라는 말 외에 다른 진단은 없었다.
두통에서 끝나지 않는 것을 느낀 후에는 다른 수가 없어 그 말을 따랐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을 몸속에 심어둔 채로 떨어지지 않는 한발 한 발을 겨우 옮기며 입구에 들어서자, 반기는 것은 역한 병원의 냄새. 나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과 함께 속을 게워 내기 시작했고, 이유 없이 몸에서 내뿜어지는 열을 감당할 수가 없어 찬물로 몇 번이나 세수했다. 물론 나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머리가 아팠고, 여전히 병원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으며 여전히 열이 났다.
병원에서는 내게 진단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처방해 준 약을 일일이 검색해 보고 있는 것도 우스워 이마를 몇 번이나 짚었지만, 알아본 바로 주어진 건 항우울제와 수면제였다. 여섯 개 정도 되는 약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매일 세 번씩 꾸준히 복용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지쳤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상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약은 그저 약이다. 의지하는 순간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차라리 나를 잃는다면 나의 결핍도 잃어버리게 될까? 의사 말대로 그걸 채우기 위해 노력을 할 수도 있지만 그냥 내가 죽어버리게 되면 결핍의 자취 같은 건 온데간데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날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팔에 새겨진 붉은 자국으로 누군가와 맺어서는 안 되는 계약을 맺고 말았다. 나의 자기 저주는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하다.
그가 내 눈앞에 형체를 드러냈던 건 죽은 지 한 달 쯤이 지나서였다.
나는 점점 음기 가득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처럼 집이 폭발할까, 가스레인지도 켜지 못해 배달 음식 하나로 배를 며칠씩 채우는 나날을 보냈고, 말라가는 몸으로 치를 떨며 그를 원망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었지만 단지 흉 진 마음 하나 때문에 나는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기력이 없는 날에는 물도 마시지 못했다. 약 같은 건 소용이 없어 먹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날 역시 마찬가지로, 침대가 유일한 활동 반경이라도 된 듯 벗어날 수 없었던 날이었다.
‘유인.’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인?’
꼭 그의 목소리 같다.
나는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았다.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었고, 그 괴로움을 자극이라도 하듯 환청이 들려오는 게, 마치 농락을 당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유인.’ 그러나 소리는 여전히 귀의 안쪽에서 명확히 들린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듯한 그 소리는 심장을 쥐어짜는 동시에 살려달라고 외치는 듯 터질 것처럼 만들었다. 또다시, 유인. 그리고 다시, 유인.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유인? 인내심을 자극하는 메아리에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만 좀!!”
뒤도 돌아보지 않는 내가 괘씸했던 걸까. 나를 찾는 이의 목소리가 그치고 곧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처음 들어보는 걸음걸이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그 존재를 인식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야, 이건 그라고.
내 앞으로 새까만 고개가 들이밀어졌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를 보고 있는 걸까.
그는 무엇 때문에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걸까.
나는 다시 한번 꼭 죽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죽어서, 나를 사랑하지 않던 그를, 날 홀렸던 그를, 다시 지옥으로 이끌어버릴 거라고. 그의 잘난 영현이 나의 죽음을 지켜보게끔 하겠다고, 그런 다짐을 했다.
그를 그리워하지 말 걸 그랬어. 나는 처음부터 그를 미워했었으니까.
그가 자살한 건 사탕발림으로 달게 날 유혹해 놓고선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던 탓이다.
먼저 죽겠단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그가 잘못되었다.
정말 날 사랑했다면, 내가 먼저 죽게 내버려 뒀어야지.
태초부터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사랑하는 척이라도 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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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세요, 나를 죽여주세요.”
나에게 고통을 준 그에게 그대로 대갚음해 주고 싶어 한동안 끊임없는 저주를 내렸다. 그가 모든 것을 지켜보는 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다. 그가 슬픈 눈을 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게 얄미워 녹은 그의 눈앞에 손목을 갖다 대 베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에 침대 머리맡에는 붉은 가로선들 이 열 맞춰 갈빛으로 변해갔고, 나의 팔은 아물 줄을 몰랐다. 그런 다음 날에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한껏 녹아내린 얼굴로 날 지켜보고 있었고, 더불어 새벽에 들렸던 곡소리와 얼굴에 번진 눈물자국은 고통 나눈 흔적으로 남아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 나는 새까매진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보곤 했다. 생긴 것과 다르게 매우 한기가 돌았다. 너는 왜 그런 표정인 걸까, 왜 내가 잠에서 깰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걸까. 그 의문점은 내가 다른 것에 신경을 돌릴 수 없게끔 했다.
그를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날 그리워할 수 없을 거란 건 어쩌면 나의 착각이 아닐까. 그를 처음 마주친 순간 죽기로 결심했던 게 떠오른다. 단순한 복수심부터 목을 치고 올라와 표출되었던 게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가로막은 건 아닐지 싶었다. 영의 존재를 믿지만, 그는 미련 없이 떠나갔기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왜 돌아왔을까? 멍하니 고심해 본 결과, 그가 우리의 그리움에서 헤엄치다 견디지 못하고 날 찾으러 온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 생각의 뒤에 자연스레 따르는 것은 입속에서 퍼지는 달콤함이었다. 그것뿐일까, 향기가 잔뜩 나는 어느 문에 들어서 세상이 온통 꽃향기로 둘러싸인 듯이 황홀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다. 그의 녹아내린 얼굴조차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로 보이는 것은 나의 시선이 얼마나 긍정으로 변하고 있는지를 나타낸다. 심란함에서 헤엄치던 난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은 유인, 그 고유명사 하나뿐이었지만 나는 그걸로도 괜찮았다. 그렇게 그의 사랑을 볼 수 있고 날 향한 안타까움을 보여준다면 나는 충분했다. 영원한 보살핌이란 그런 것이기에. 이제야 당신은 내가 원하는 걸 알아챈 거야?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느 대답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의 한마디가 없었더라면 나의 우울증은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였을 테고, 자기 저주 역시 그만둔 채로 죽은 그와 평생을 함께했을지도 모른다. -날 그리워해 줘서 고마워, -아냐, 당신이야말로. -내가 사랑을 못 보여줘서 미안해. -아냐, 사실은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기대했던 대화는 이런 참회와 회개의 대화였단 말이다.
‘유인.’
“왜.”
‘후회돼.’
“뭐가?”
‘너와 같이 죽지 못한 게.’
“….”
‘그때 네가 못 빠져나가게 팔을 붙잡았어야 했어.’
그는 늘 그랬다. 날 매우 큰 기대감으로 부풀려 터지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고선 아주 자그마한 바늘 하나로 내가 다시 쪼그라들게 했다. 착각은 무슨, 그가 돌아온 건 날 동물 안 원숭이 보듯 하기 위함이었어.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던 검은색 물감을 맑은 물 하나에 톡 풀어 넣었다. 점점 지배당하듯 미끄러지며 투명이 제 빛을 잃는다. 다시 염오감이 몸을 타고 돈다. 그 색 역시 검었다. 그걸 막을 수를 떠올려보자니 그가 다시금 내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 말곤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또다시 그의 탓으로, 그를 증오해야만 하며, 그간 축적되고 누적돼 온 원망은 짐처럼 늘어간다. 어디 떨굴 수 없는 노릇이라 버겁고 벅차기만 하다.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과 실망감이 내 손목을 꽉 쥐고선 놓아주질 않았다. 나는 칼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거울 앞에 앉았다. 사랑과 비례하게 커지는 혐오를 나는 전부 알면서도 이젠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날의 끝을 깊게 박아 넣은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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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부을 수도 없이 통통해진 눈두덩을 밤새 적셨다. 옷까지 스며든 피의 테두리는 진한 색으로 변했고 팔은 금방이라도 벌어질 듯한 상처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더러운 거울은 날이 갈수록 더욱 먼지가 쌓였다. 아, 진짜, 씨발, 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울음은 목이 아닌 그 밑의 장기들에서부터 튀어 올라왔다. 비명을 지르고 그치기를 반복하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는 혹사를 강제로 즐겨야만 했다.
‘유인, 기다리고 있을게.’
그는 떠났다.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가고 싶다던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로 떠났을 지도, 신혼여행으로 가고 싶다고 했던 스위스의 베른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것들은 내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죽도록 미워하고 사랑하는 그가 내게 두 번째의 절망을 선사하고 떠난 것에 느끼는 모든 부정적 감정이 다시금 원망과 증오로 돌아가 더는 내 손으로 그를 죽일 수 없단 사실이 괴로워서 그렇지. 그는 더 이상 내게 매달리지 않겠단 마지막 말로, 생에 건드려진 적 없는 나의 깊은 곳을 푹 찔러버렸다. 그를 향한 자격지심과, 열등과 한 번쯤은 져주길 기대한 것과, 결핍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욕심과, 그를 구원해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영웅심리. 사랑받고 싶던 마음, 감히 품은 동정, 모든 걸 다 들킨 것 같은 수치심.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아이러니함.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내게 뭘 주고 싶어 다시 돌아왔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의 위에 서 본 적이 없었고 언제나 큰 손바닥 안에서만 열심히 굴렀다. 그는 날 손쉽게 누를 수 있었으나 나에게 그런 힘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욕이란 욕은 다 내뱉으며 죽어 두 번 다시 환생도 하지 말라고 했던 게 어제의 일이다.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솔직하지 못한 그가 죽을 만큼 밉고 싫었다.
이로써 나의 자기 저주는 그 의미를 잃었다. 내가 찬찬히 죽어가는 고통을 눈앞에서 보여주자던 다짐 역시 의미를 잃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까. 나의 정체성을 잃었다. 그를 미워하고 사랑하던 내가 사라졌다. 그 짓을 그만두어야 하나? 그럼 나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 나의 영혼이 없는 육체의 껍데기뿐을 이제 누구한테 맡겨놓아야 할까. 팔에 잔뜩 새겨진 더러운 그림들은 여전히 아물 줄을 모른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에도. 아물어도 아물지 않은 듯할 것이다.
그간의 피로가 한 번에 나를 집어삼킨다. 견딜 수 없이 눈이 감긴다. 침대에 겨우 기어올라 이불도 없이 베개를 벤다. 영혼이 누워있다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얼음장처럼 차갑다. 하아, 한숨을 내쉬니 입김이 보이는 듯한 환각이 인다. 눈은 자꾸만 감겨오는데, 가슴팍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뒤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소소, 등에 소름이 돋는다.
‘네가 날 불렀어.’
그의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자, 소원 들어줄게. 가자, 가자, 가자.’
소원? 무슨 소원?
내가 가면, 뭔가 달라지려나?
‘그가 기다리고 있어, 가자.’
그가?
정말?
그가 정말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