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가 아이의 취미이지만 아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린 지 어느덧 8개월째. 여전히 큰 아이는 동생이 안타를 치던 삼진을 당하던 아무런 관심이 없고, 우리 부부는 두 아이 상황을 각각 존중하며 즐기는 건지 의무감인지 모를 태세로 부모라는 위치에서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있다.
첫째가 중학생, 둘째 아이가 초등학생. 동남아 풀빌라로 여행지를 찾던 우리 집의 휴가는 남편을 제외하고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좋아하는 분위기는 어느덧 사라졌다. 어릴 때부터 풀(pool) 수영에만 익숙한 아이들은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 입수하는 그 예쁜 옥빛의 바다를 싫어했다. 화려한 산호들에 감동을 받기는커녕 뻐끔뻐끔 먹을 것을 달라고 쫓아오는 물고기들을 무서워했다.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할 나이가 되고서는 휴양지는 안 간다며 자동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사춘기 후기쯤 지나고 있는 첫째는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의 필요성도 즐거움도 못 느꼈다. 이러다 둘째까지 저 나이가 되면 네 식구가 함께할 시간을 더 갖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에 기필코 어디든지 가야겠다고, 휴가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다.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끝에 화려한 쇼핑거리들이 가득한 도시여행이 사춘기 소녀에게도 잘 맞고, 야구강국이어서 야구소년에게도 잘 맞는, 짧은 비행시간과 자연을 즐기기를 좋아하는 남편까지 생각하여 일본 후쿠오카로 정했다. 역시나 각자의 구미에 당길 것들이 있어서인지 출발 전부터 들뜬 분위기였다.
관광, 먹거리, 쇼핑 등 휴가라는 목적에 맞게 리프레쉬가 된 3박 4일 일정. 가족 모두가 즐거웠다고 다음에 또 가고 싶다는 후기를 전했다. 예상 밖에도 서울보다 덜 습하고 푸릇푸릇하고 청명했던 날씨에 만난 유후다케. 투어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남편과 첫째는 그 광경에 매료돼 끊임없이 동영상과 사진 찍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둘째는 자연이 심심했고, 무엇이 좋은지 몰랐다. 버스에서는 야구 동영상 재생버튼에 손을 뗄 줄 몰랐고, 풍경이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자고 내려도 한쪽 구석에서 돌멩이만 내내 던지고 있었다. 동상이몽 속 혼자서 야구 전지훈련을 왔다고 생각하는걸까. 어쩔 수 없는 내 잔소리는 후쿠오카에서도 아이의 귓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일정 속에서도 이번 휴가가 좋았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둘째, 그 이유는 당연 새 글러브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기 때문일 테다. 이미 여행 전부터 글러브를 사기 위한 정보를 수집했고 '야구공방 M' 후쿠오카 지점을 찾아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움직였다. 구글 지도로 길 안내를 담당한 첫째, 글러브 정보 수집에 동참했던 남편, 파파고와 함께 짧은 일본어를 구사한 나. 야구공방에 들어선 아이는 유튜브에서 보아왔던 알록달록 사방 전체가 글러브인 매장 안의 분위기에 매료되었고, 이미 마음먹고 왔던 라인의 글러브를 요청하여 일일이 껴본 후 본인의 스타일의 맞는 것을 선택했다. 구매확정을 하면 30분 동안 직원이 글러브를 직접 길들여주었고, 바로 착용이 가능할 만큼 유연해진 글러브에 새삼 놀라웠다. (한국 매장에서 길들이기를 위해 일주일을 맡겨 받은 글러브와 비교했을 때 추가 작업이 전혀 필요 없었다. 게다가 비용 또한 무료였다.) 아이는 당장 공을 던지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고, 매장 한편에 있는 연습장에서 구속을 재며 남편과 캐치볼을 했다. 글러브 구매 후 아이는 예상외로 많은 에너지가 가득 채워졌으며, 그 이후 일정엔 내내 미소 띤 얼굴로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남편과 나는 어이없는 눈빛을 수도 없이 주고받았고, 평소 걷는 걸 무진장 싫어했던 아이의 발걸음이 가벼워 진 것만으로도 잔소리 없는 평화로운 시간이 되었다.
기왕에 간 거 야구라도 한 경기 보고 싶었으나 마침 올스타전 기간이었고 후쿠오카에서는 경기가 없었다. 경기를 즐기지 않는 첫째를 위해서도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정말이지 안 그랬음 이번 휴가는 진심 전지훈련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