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연필꽂이
다음 날 아침, 너울이는 늦잠을 잤다.
엄마는 일찍 일어나 베란다를 살펴보았고, 곤충채집통은 비워져 있었다.
뚜껑이 열린 통 안에는 몇 마리 죽은 곤충들만 남아 있었다.
엄마는 너울이가 또 마음 아파할까 봐 조심히 통을 들어 한켠에 비워두었다.
“일어났어? 물 한 잔 마셔.”
엄마는 부엌에서 달걀 프라이를 굽고 있었고,
너울이는 냉장고 문을 열고 유리컵에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곤충채집통, 너울이가 열어둔 거야?”
“응. 내가 열어놨는데…… 다 도망갔나 봐.”
너울이는 급히 컵을 내려놓고 베란다로 향했다.
비어 있는 채집통을 확인한 순간, 너울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었다.
방충망을 열고, 너울이는 조심스레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채집통을 베란다 한켠, 그늘진 곳으로 밀어두었다.
“괜찮아? 숙제는…… 못하게 됐는데.”
“어쩔 수 없지. 어젯밤 내내 생각했어.
숙제는 못해도…… 살려주는 게 맞는 것 같더라고.”
엄마는 작게 웃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달걀 프라이 위엔 케첩으로 눈·코·입이 그려졌고,
식빵은 딸기잼이 곱게 발라져 반으로 접혀 있었다.
“짠, 오늘은 케첩 친구~”
우유는 델몬트 로고가 새겨진 유리컵에 담겨 있었다.
너울이는 식빵을 한 입 베어물며 웃었다.
엄마는 그 옆에 앉아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들고 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 보며, 조금씩 평소의 아침으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를 마친 너울이와 엄마는 소파에 앉아
TV 프로그램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보고 있었다.
띵——동!
“너울아~ 노올자!”
딱 목소리만 들어도, 이제 누군지 알겠다.
잘 알면서도 너울이는 괜히 묻는다.
“누구세요?”
“너울아, 나야! 성빈이! 놀자!”
달칵—
문이 열리고, 두 아이는 마주 선다.
성빈이 얼굴은 햇볕에 까맣게 탔지만, 눈은 오늘도 반짝였다.
‘얘는 왜 맨날 이렇게 눈이 초롱초롱한 거야?
까만 푸들 같아…….’
“들어와!”
“안녕하세요.”
오늘도 인사를 잘하는 성빈이다.
“성빈이 왔구나. 오늘은 더우니까 둘이 집에서 놀아.
아줌마는 시장 좀 다녀올 건데, 둘이 잘 있을 수 있지?”
“엄마, 나 돈가스 먹고 싶어!”
“돈가스 손 많이 가는데…… 알았어.
그럼 오늘 성빈이도 돈가스 먹고 가.
너울이 곤충채집도 많이 도와주고,
너울이한테 잘해줘서 아줌마가 고마워.”
“아, 넵! 감사합니다!”
성빈이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거실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식물이 많아진 거 같아.”
“아니야. 식물이 많아진 게 아니라 매일 자라서 그래.
덩굴식물은 잘라도 또 자라고,
가끔 엄마가 옆집 아줌마한테도 나눠주는데도 그래.”
“대단하다. 우리 엄마는 선인장도 다 죽이는데.”
“대단한 거야?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당연히 대단하지. 선인장은 물 안 줘도 안 죽는 앤데 죽었다니까!”
나갈 준비를 마친 너울이 엄마는
두 아이의 대화를 듣고 웃으며 나섰다.
“아줌마 금방 갔다 올게~”
“다녀오세요~!”
문이 닫히고, 잠시 집 안은 조용해졌다.
“뭐 하고 놀지? 게임기 있어?”
“없어. 우리 연필꽂이 만들기 할래?”
“놀자니까.”
“노는 거야. 점토 놀이.”
“노는 거 맞아? 숙제 아니고?”
“할 거야, 안 할 거야?”
“…할게.”
“우리 집에 점토 많아!”
너울이는 테이블을 펴고, 수납장에서 엄마 물건을 꺼내와
지점토 세 개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찰흙이 아닌데… 이거 비싼 거 아니야?”
“엄마가 써도 된대!”
“그래? ‘전문가용’이라고 적혀 있는데…?”
조금 불안한 성빈이와 달리,
너울이는 봉지를 뜯어 점토를 꾹꾹 뭉쳤다.
“뭐 해, 너도 얼른 뜯어봐.”
반죽을 하고, 밀대로 밀었다.
한쪽은 얇고, 다른 쪽은 두꺼웠다.
다시 반죽하고, 다시 밀고.
몇 번 해보니 어느새 손에 익었다.
너울이는 평평해진 점토 위에 그릇을 대고,
지점토 칼로 능숙하게 잘라냈다.
성빈이는 한참 제자리였다.
반죽은 잘했지만 밀면 찢어지고, 말라붙고,
괜히 또 반죽만 더 해서 점점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둘은 조용히 집중했다. 대화가 끊긴 시간.
“…우리 다른 거 하면 안 될까?”
“안 돼.”
너울이는 단호했다.
성빈이의 점토를 보고는 젖은 수건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너울이는 옆면을 만들고 있었다.
꽃무늬, 나뭇잎 모양의 틀로 점토를 눌러 찍고,
물을 묻혀 붙이며 뚝딱뚝딱.
너울이는 뿌듯했다. 정말 즐거웠다.
“우와, 잘 만들었다.”
“고마워. 우리 엄마가 공예하거든.
그냥 보면서 대충 따라 해본 거야.”
생각해보면, 집 안 곳곳에 놓여 있던 장식들.
장미가 둘러진 장스탠드, 호박덩굴로 감싸인 각티슈 케이스,
국화로 장식된 선반들.
다 지점토였다.
성빈이는 조용히 점토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뭐 해? 연필꽂이 숙제라고~ 내가 가르쳐줄게.
먼저 점토를 반죽해서 공을 만들어봐.”
“그렇게?”
“세게 밀지 말고, 앞뒤로 천천히. 달래듯이 밀어봐.
돌려가면서, 살살.”
성빈이는 너울이 얼굴 한 번 보고, 밀대 한 번 보고,
천천히 밀었다.
이제는 꽤 제법이다.
동그란 그릇을 놓고 칼로 자르자 아랫부분이 완성되었다.
“옆면이 문제네. 나는 너처럼 못해.”
고민하는 성빈이를 보며,
너울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너, 뱀 잘 만들지? 최대한 길게 만들어봐.”
성빈이는 여러 마리의 점토 뱀을 만들었다.
그것들을 돌돌 말아 아래부터 위까지 감아 올렸다.
완성에 가까워졌다. 성빈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 완성했어!!”
“이제 베란다 응달에, 바람 잘 통하는 곳에 둬야 해.”
“햇빛에 두면 더 빨리 마르잖아?”
“바보야! 그럼 금 가! 미술 시간에 배웠잖아!”
혼나는 성빈이.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너,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 많아.”
성빈이는 웃으며 점토판을 베란다 응달에 조심스레 놔두었다.
둘은 손을 씻고 장난치며 뒷정리를 했다.
마침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 왔다~”
“다녀오셨어요?”
“잘 있었어?”
“엄마, 우리 연필꽂이 만들었어!”
“오, 그래? 찰흙이 있었어?”
“엄마 점토 썼어!”
“뭐? 그거 비싼 건데… 점토 도구만 빌려 달라면서?”
“찰흙이 없어서 그랬어. 미안해. 많이 비싸?”
엄마는 성빈이 얼굴 한 번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잘했어~”
정신없어 보이지만, 웃는 얼굴이었다.
너울이와 성빈이는 방에 엎드려 스케치북을 꺼냈다.
너울이는 가로수길에 비친 나무를 그렸고,
성빈이는 손오공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그림을
몇 번이고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너 정말 잘 그린다. 미술 학원 다녀?”
“아니. 너도 잘 그리네. 진짜 손오공 좋아하네?”
“응. 좋아해. 나도 슈퍼보드 있었음 좋겠어!”
“못말려.”
끼득끼득.
방 안에 잠시 웃음이 가득 찼다.
스각, 스각.
연필 소리만 방 안에 남았다.
“있잖아, 성빈아.”
“응?”
“…”
“말해~”
“미안해.”
“뭐가?”
“너가 잡아준 곤충들 있잖아.
그거 다 놓아줬어.”
“응? 왜? 우리 그날 엄청 열심히 잡았잖아.
숙제로 낼 거라면서?”
“그게 말이야… 나는 그냥, 채집만 하는 건 줄 알았어.
근데 아빠가 곤충에 핀 꽂아서 액자에 넣는다고 해서…”
성빈이는 순간 ‘멋지겠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너울이의 표정이 슬프고 미안한 표정이었다.
성빈이는 왜 너울이가 그런 얼굴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게 자꾸 신경 쓰였다.
위로는 잘 못 하지만, 그냥…… 듣고 있어주고 싶었다.
“나한테 미안해 안 해도 괜찮아. 나는 너랑 재미있었어.
그리고 곤충채집 말고 다른 방학 숙제 잘 해가면 되지 뭐.
연필꽂이 만들기는 너가 우리 반에서 1등 할걸?
오늘 만들기 하는 거 보니까 완전 미술 선생님이던데!”
너울이가 다시 웃길 바랐다.
정말, 그랬다.
“그래도 미안해. 너가 그날 나 도와준 건데.”
“도와준 거 아니야. 같이 논 거야~
다음에 또 같이 곤충채집하자.
그땐 통에 담지 말고, 잡고 풀어주기만 하자!”
“응. 나도 재미있었어.”
방 안의 공기는 어색했지만,
너울이는 성빈이가 고마웠다.
“밥 먹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울이와 성빈이는 반가운 듯 동시에 대답했다.
“네~! 가자!”
앞장선 너울이는 웃고 있었다.
성빈이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