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아름다운 눈
볼 관(觀)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내가 호들갑을 떨며 나를 반겼습니다.

초등학생 딸 혜인이가 엄청난 문학 천재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녀온 딸이 아내에게 지어주었다는 시는 이러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몰랐던 우리 부부는 딸의 놀라운 문학적 소질에 깜짝 놀랐습니다.

며칠 뒤, 그것이 전 국민이 아는 애송시라는 사실을 알고는 어이없어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유쾌한 웃음 끝에, 시인이 말한 '자세히, 오래 보는 일'에 대해 긴 여운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본다'고 할 때, 한자에는 두 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바로 '볼 견(見)'과 '볼 관(觀)'입니다.


볼 견(見)은 눈 목(目) 아래에 걷는 사람(儿)의 다리가 결합된 상형문자입니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그저 걷다가 스쳐 가듯 보는 수동적인 시선입니다.


반면, 볼 관(觀)은 파자(破字)해 보면 그 시선의 깊이가 전혀 다릅니다.

이 글자는 황새 관(雚)과 볼 견(見)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황새 관(雚)의 형태를 분해해 보면 풀 초(艹) 아래에 새의 부르짖음을 뜻하는 훤(吅), 그리고 새 추(隹)가 숨어 있습니다.

누군가 풀숲에서 울고 있는 작은 새의 소리를 듣고,

그 존재를 찾기 위해 기꺼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는 시선입니다.


나태주 시인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한 '본다'는 의미가 바로 이 볼 관(觀)이었을 것입니다.

이 단어를 묵상하다 보니, 나는 과연 내 주변의 사람들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깊이 묻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참석했던 대안학교 세미나에서 30년간 아이들을 품어온 노(老) 교사께서 젊은 교사들에게 차를 나누며 해주신 당부가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하길 바란다면, 감시자의 눈이 아니라
관찰자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잘못을 찾아내려는 눈,

훈계하려는 눈이 아니라,

그들의 표정 하나, 몸짓 하나, 말 한마디의 이면을 유심히 관찰(觀察)하라는 권면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내 곁의 사람들을 향한 나의 시선을 돌아보았습니다.

가족들과 지인, 동료들에게 관찰자가 아니라 정답을 들이미는 감시자요 훈계자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끄러운 반성이 밀려왔습니다.

우리의 어설프고 날 선 시선과 달리,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잘못을 찾아내려는 눈이 아니라,

존재만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눈.


훈계하려는 눈이 아니라,

상처와 눈물까지 놓치지 않으시는 눈.


그 시선이 관( 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해 늘 그 눈으로 보고 계셨는데,

나는 그동안 내 곁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날카로운 눈으로 들이밀었던가.


오늘 하루만큼은, 판단하려던 눈을 내려놓고

한 송이 풀꽃을 들여다보듯 내 곁의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조용히 기도합니다.




이전 10화맑은 마음으로 포근한 햇살 앞에 서다. 회복(恢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