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1
"안녕하세요.
당신의 감정 중 하나를 사고 싶은데..
무엇을 파시겠습니까?"
이 미친놈은 또 뭐야.
사채업자한테 쥐어터지다 도망쳐
간신히 숨을 곳을 찾다가,
인적 드문 공원에 있었는데
여기도 미친놈이 있는 곳이었나 보다.
"아저씨. 저도 돈 없으니까, 그냥 가세요."
남자는 여의 팔에 감긴 붕대와 얼굴의 상처,
살갗이 드러난 부위마다 빠짐없이 어린 멍 자국을 본다.
여는 괜히 옷 끝단을 잡아당겨 몸을 가리려한다.
뭐, 어차피 너덜거리다 찢어져버릴 낡은 옷이지만,
그냥, 괜한 관심은 꺼려지니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여의 옆에 앉는다.
여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남자 얼굴을 본다.
남자는 여를 보고 빙긋, 웃는다.
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본다.
남자는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한다.
"예술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닥치고 있으면 질려서 가겠지.
"..."
"예술이란 말이죠."
아예 본격적으로 주둥이를 놀리려나보다.
그냥 딴 데로 갈걸 그랬어.
"감정을 사용하는 겁니다.
음.. 알기 쉽게 말하자면..
감정은 물감입니다.
예술가들은 붓에 감정을 묻히고
무언가에 덧칠을 하는 것이죠.
무언가를 칠하던가.
그렇게 되면 그 무언가는,
더 이상 무언가에 머물지 않는답니다.
아름다워진다는 심미적인 관점에서도,
비싸진다는 세속적인 관점에서도,
사실은 모든 관점에서 한 차원 더 높아지죠.
그런데.."
남자는 난처한 듯 웃는다.
"저는 너무 오랜 시간 예술에 심취해
예술품들을 만들어내다 보니..
제 안의 감정들을 전부 써버렸습니다.
이젠 어떻게 해도 감정이 생기지 않더군요."
방금 웃지 않았나?
여는 남자 얼굴을 흘겨본다.
남자는 여와 눈을 맞추며 크게 미소 짓는다.
올라가는 자신의 입 꼬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을 사곤 한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감정은 분에 맞지 않을 정도로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남자는 아예 본격적으로 여를 향해 몸을 돌려 앉고는
"희, 노, 애, 락, 그 외 무엇이든 사겠습니다.
제게 판매하실 의향 있으십니까?"
"미친놈.."
"에이,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감정을 산다는 게 말이나 돼요?
나 돈 없다니까? 사기 칠 거면 딴 놈 알아봐요."
남자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제가 왜 굳이 당신께 계약을 제안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제일 만만해보이니까 그렇겠죠, 뭐."
"당신이 이곳에서 가장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서 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감성의 울림, 풍부한 영양분들.
군침이 돌 정도군요."
남자는 과장스럽게 침을 꿀꺽 삼킨다.
"에이씨.. 진짜.."
"희망 가격이라도 말해보세요.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미친 새끼 때문에 괜히 더 기분만 잡치네.
"어차피 손해보실 것도 없지 않으십니까."
"..."
맞는 말이다.
아무것도 없다 못해 공허한 인생.
부모라는 작자들은 자해 공갈단에,
사채업자들한테 떠밀려서 도망이나 다니는 신세고,
형은 신호를 위반한 차에 치여 식물인간에,
여는 부모 대신 사채업자들한테 매일 쳐 맞는 게 일이니까.
한때는 화목한 가정이었던 것 같은데..
됐다. 옛날 생각은 하지 말자. 괜히 속만 쓰리니까.
근데 이 미친 새끼는 감정을 어떻게 사서 가져가겠다는 거야.
어차피 돈 받으러 기다리는 깡패들은 저녁은 되어야 집에서 나갈 거다. 그때까지 얘기나 들어볼까.
"아저씨. 그.."
남자는 여의 말을 자르며 말한다.
"아무것도요."
여의 생각을 듣기라도 했나?
"뭐가 아무것도예요. 아직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감정을 사겠다는 이야기냐, 뭐 이런 거 아니십니까?"
"..."
"제가 맞혔네요. 하하."
"..그래서요. 어떻게 사갈 건데요.
뭐 수술이라도 합니까?
그런 거면 안 해요.
장기나 떼다 파시려나 본데,
그런 거면 저기 노숙자들 많으니까 쟤네들 중 하나 데려가요."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라니까요?
방법도 간단해요. 정말입니다."
여의 안에서 남자의 이름이 바뀐다.
'그냥 미친놈'에서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으로.
"뭐,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남자는 품에서 하얀 종이 한 장과 펜을 꺼내며 말한다.
"계약서입니다. 서명만 하시면 돼요."
"뭐, 노예 각서나 신체포기 각서 이런 거요?"
남자는 여의 이죽거림에는 반응하지 않기로 한 듯
마저 자신의 설명을 이어간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어디까지 맞춰줘야 되나.
이 미친놈한테.
에이씨. 그냥 하라는 대로 해주지, 뭐.
"..여요. 김 여."
남자는 종이에 펜으로 글자를 적으며
"김..여.. 외자인가요?
"네."
"그러면.. 네. 됐네요.
자, 얼마를 원하십니까?"
"얼마까지 되는데요."
"무슨 감정을 파느냐에 따라 다르죠."
여는 피식, 웃고는
대충 아무렇게나 씨부린다.
"4억 원 정도? 그러면 사채 빚도 갚고,
형 수술비도 내고, 집도 사고,
부모님도 더 이상 자해 공갈 안 해도 되고.
어쩌면 다시 예전처럼.."
"흠.. 검소하시네요.
그럼 4억 원이면 되는 거죠?"
여는 멍하니 허공을 보며
"아니, 아니 이왕 줄 거면 10억 원 주세요.
10억 원이면 죽기 전까지 돈 쪼들릴 일은 없겠지."
"파시는 감정은?"
여의 눈이 잠시 젖어든다.
"..슬픔이랑 아픔, 고통. 뭐 그런 것들이요."
"네. 알겠습니다. 그것들 다 합하면 10억 원 정도는 되겠네요."
"네, 네.
아니, 네?"
"내일 이 시간, 여기서 다시 만나시죠."
"뭔.. 끝이에요?"
"오늘 할 일은요. 내일 뵙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일이 바빠서요."
남자는 여가 더 말 걸 틈도 없이 쌩하니 사라져버린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린 남자.
미친놈치고는 공을 많이 들이는데..
에휴. 어차피.. 뭐, 됐다.
이제 밤이니까,
집에 들어가도 되니까,
일단 집으로 가자.
사채업자 새끼가 내일도 오면
또 쳐 맞다 적당히 도망쳐서 오면 되겠지.
#2
"안녕하세요? 여기 계약서에 싸인 하시면 됩니다."
당연히 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어제, 그 자리에서 여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
어제보다 늘어난 여의 상처들엔 관심이 없나보다.
여에게 계약서와 펜을 건넨다.
여는 야구방망이로 맞아 부어오른 왼쪽 눈을 뜨려고
힘들게 노력하며 남자가 내민 계약서를 읽는다.
<계약서>
1. '김 여'는 '예술가'에게 슬픔을 포함한 고통을 판다.
2. '예술가'는 '김 여'에게 금십억원정을 대가로 지불한다.
예술가 (서명 및 싸인)
김 여 (서명 및 싸인)
"간단하네."
"복잡하다고 좋을 것 있나요."
여의 인생은 이제 어쩔 것도 없다.
사채업자가 내일까지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여부터 원양어선에 팔아버린댔으니까.
이 미친놈 손에 장기 다 털려서 죽게 되든,
사채업자한테 팔려가서 피똥 싸게 일하다 죽든,
어차피 죽는 건 똑같으니까.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살 가능성이 높은 쪽을 선택해야지.
여는 말없이 계약서에 싸인을 한다.
여가 계약서와 펜을 돌려주자,
남자는 씨익, 웃고는 계약서를 품에 소중히 챙긴다.
그 대가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다시 여에게 건넨다.
통장과 도장, 비밀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이다.
여는 통장을 확인해본다.
예금주 김 여
잔고
1,000,000,000원
0이 하나, 둘, 셋... 아홉 개.
십억 원.
"어.."
여는 입은 열었지만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남자는 손목의 시계를 쳐다보며 말한다.
"오늘 11시 59분에서 내일 00시 00분이 되는 순간,
우리 계약은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슬픔과 고통이 저에게는 기쁨과 행복이 될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다음에 뵐 수 있으면 또 뵙도록 하죠."
남자는 어제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여의 손에 쥐여진 통장과 도장, 비밀번호가 적혀있는 포스트잇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이게 현실이 맞나?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여는 받은 것들을 다 주머니에 놓고
뺨을 세게 후려친다.
다시 후려친다.
눈물이 나올 때까지.
눈물이 나온다.
아프다.
꿈이 아니다.
이게 현실이라고?
어안이 벙벙하다.
머리까지 어지러울 정도로.
엄마랑 아빠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이제 일 안 해도 된다고?
형 병원비도 해결됐다고?
로또에 당첨됐다고 할까?
여는 그대로 주저앉아 운다.
펑펑 운다.
얼마나 울었을까.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낡은 시계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일그러지며 들린다.
뻐꾹
뻐꾹
뻐꾹
여는 눈물을 닦고 일어난다.
여는 웃는다.
신나게 집으로 달려간다.
#3
"으음.."
여가 낡은 이불 속에서 꿈틀거린다.
바로 발길질이 쏟아진다.
여는 이불 밖으로 기어 나온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
그리고 그 가운데 집의 유일한 의자에 앉은 사채업자가
여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채업자가 고개를 돌려 옆의 덩치에게 말한다.
"오늘까지라고 내가 말했었나?"
덩치는 대답한다.
"네. 확실히 오늘까지 돈 상환하지 않으면 원양어선에 저 놈부터 팔아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채업자는 다시 여를 내려다보며
"그래. 여기 증인도 있잖아. 남의 돈을 빌려갔으면 갚아야지. 누구는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뭐, 물론 저 중동 애들은 땅 파가지고 석유 나온 걸로 장사하기는 하는데.. 여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멀미약은 많이 준비해놨냐? 뱃멀미 심하게 하면 배 안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 아유 걱정된다, 걱정돼! 크히히."
"..얼마야."
"엉?"
"빚.. 다 합해서 얼마냐고.."
"왜? 어디 부잣집이라도 털었냐?
아으, 그렇게 더러운,
세탁기도 안 돌린 돈을 어떻게 받아?
근데 뭐.. 그거라도 있어야 할 수 있는 이야기긴 하다. 그치?
얼마더라.. 이자까지 합치면 1억 3482만원이었지?
아, 방금 1분 지나서 또 올랐다.
이제 1억 3482만 1000원."
"지금 가져온다. 가져올게, 돈."
"오호.. 이 새끼가 진짜 부잣집 털었나?
그럴 깡다구도 없는 새끼 같았는데.."
사채업자는 옆의 덩치에게 말한다.
"애들 두 명 정도 데려가서 저 새끼 감시해.
도망치려고하면 어디 하나 병신 만들어서 데려와도 돼."
사채업자는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이것저것 만지며
"뭐해? 가져와."
덩치가 여에게 대충 옷가지들을 던진다.
받은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입는 여.
베게 밑에 숨겨둔 통장과 도장을 챙긴다.
비밀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은
번호를 외우자마자 찢어 공원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4
"와, 이 새끼 진짜로 가져왔네?"
종이봉투에 담긴 오만 원 권 다발들을 보며
사채업자는 박수를 치며 감탄한다.
"이야~ 이렇게 쉽게 갚을 수 있는 걸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우리랑 노는 게 그렇게 재밌었어?"
"..이제 꺼져. 그리고 다신 오지 마."
"아유~ 아무렴 그래야지~
근데.. 혹시 모르니까, 명함 한 장은 두고 간다.
또 언제 우리 고객님이 될지도 모르니까?"
"차용증도 내놔."
"야박하다, 야박해. 내가 떼먹기라도 할까봐?"
"차용증 몰라서 내가 떼먹힌 돈만 2백만 원이 넘어."
"이제 몇 억은 넘게 가지고 있는데,
겨우 그 정도에 너무 마음 쓰지 말어~
그러다 스트레스 때문에 오래 못살아, 정말이다?"
"..나가."
"네, 네. 그런데.."
"뭐."
"그렇게 좋냐? 실실 쪼개고 있으니까
보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진다, 야."
여는 자기 얼굴을 만져본다.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다, 여는.
사채업자는 대충 휘갈긴 차용증을 여에게 집어던지고 나간다.
덩치가 남자들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른다.
텅 빈 집.
이제는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을 집.
"프히.. 프히히.. 흐,흐,흐흐..
키킥,킥킥킥.. 씨발! 개씨발! 푸하하하!"
여는 웃는다.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는다.
동시에 다시 집에서 나갈 채비를 마친다.
밀린 형의 병원비까지 오늘 한 번에 해결해버릴 거다.
여는 방구석 낡은 가방을 짊어 맨다.
#5
예술가에게서 여가 받은 돈.
사채를 갚고, 밀린 형의 병원비를 갚아도,
아직 한참이나 남는다.
병원비를 지불하고 형의 병실에서
아빠와 엄마는 여를 끌어안고 숨죽여 운다.
여는 웃는다.
계속 웃는다.
웃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