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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왜 되새김질을 할까?

by 서강


언어의 변주자


1장 농밀한 언어를 지나, 2장 지적인 생각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설렘과 함께 그 안에 숨겨진 세계를 만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는 진리에 마주한 순간이다. 한국말은 특히 그러하다. "조선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라는 속담이 증명하듯, 우리의 언어 속에는 사전에 실리지 않은 수많은 의미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한 마디가 조청처럼 농밀하게 녹아, 진액을 넘어 깊은 맛을 내는 것이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달리, 상대방은 다르게 받아들여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말과 글을 반복해서 음미해야 한다. 듣고 또 듣고, 읽고 또 읽어야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언어의 숲을 헤매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되새김질'의 지혜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옛말은 언어를 넘어 삶 전체에 적용되는 진리다. 내가 베푸는 만큼 세상은 내게 돌려준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떤 말을 세상에 내보내는 가에 따라 내 언어 세계의 윤곽이 결정된다.




주는 대로 돌려받는 세상 이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습관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겉으로는 그 가정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김종원 작가의 말처럼 "주는 것만 돌려받을 수 있다." 기도라는 언어적 행위를 통해 세상에 좋은 것을 모아, 모아서 기도를 올린다. 기도를 올린 만큼 나에게도 돌아오는 것이다.



필사를 하며 깨닫는다. 언어의 '변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을 만날 때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사무실에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도 단순히 "안녕히 가세요" 대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울림이 얼마나 클까,



필사 덕분에 나는 언어의 수리공도 되고, 변주자도 되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묵묵히 자기 소임을 다하는 해처럼, 삶에 적용할 것들을 실천하며 성장하고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인생의 소풍을 마치지만, 강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유유히 흐른다. 세상일에 동요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오늘,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의 언어가 만드는 세계의 한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중이다.




KakaoTalk_20250226_080803967_02.jpg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中


키워드 : "변주"

깨달음 : 상황에 맞는 가장 적합한 언어로 "변주"할 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배"가 된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언어의 "변주"를 생활화하자.

적용 : - 사무실 방문한 손님들에게 "안녕히 가세요"라는 언어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로 "변주"

- 모든 만남에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로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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