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임
내 사주엔 자식이 없단다.
명리학을 배우는 친구가 마흔이 넘어 말해준 이야기다.
그런데 신기한 일일법도 한것이.
24살 아이를 자연으로 갖을수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길 들었다.
그저 배가아파 돌고돌아 갔던 산부인과에서 당장수술해야한다며 급성으로 수술을 받았다.
심지어 난 마취중에 보호자인 엄마의 결정으로 나는 내 여자의 심장을 잃었다.
깨어보니 스물네살 갓 대학을 졸업한 꽃띠같은 나는,
민들레홀씨가 다 날라가고 남은 ‘겻'과 같은 초라한 모습이였다.
그 소식을 전한 의사는 심지어 만삭의 여의사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대수롭지않은 말투와 툭 튀어나온 배는,
내평생 산부인과 트라우마를 만들어준 장면이였다.
‘왜 울어요? 시험관아기로 가질 수 있어요 요즘 얼마나 기술이 발달했는데요’
수술후 닝겔 리드줄을 달고 진료실에서 진료받던 나는 주저앉아 울었던 기억만 난다. 엄마는 뭐가 그리 의사의 눈치가 보였는지 그런 나를 무척이나 창피해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않았다.
누구도 말걸지 않길바랐다.
퇴원하는 날만을 기다려 가장먼저 무엇을 할까부터 고민했다. 가장먼저 누구를 만날까부터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가장 처음 성당을 갔다. 사람에겐 매달릴수 없을것 같아 신께 매달리기 위해서 말이다.
따져묻고 싶어서 일 수도 있다. 신부님의 예비신자 허락을 기다리며 성모상 앞에 벤치에서 보낸 3시간이라는 시간이 30분남짓으로 느껴질만큼 혼자 속으로 많은 걸 물었다.
' 왜 저에요? 왜 저는 안돼요? '
그리고 후회도 함께 밀려왔다.
' 제가 아이들을 시끄럽다고 싫어해서 인가요?
아이들을 예삐여기지 않아서 인가요?
아이들을 귀찮아 했던 마음이 괘씸해서 인가요? '
다행히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예비신자가 된 나는 매달릴 곳이 생겨 그저 기뻤다.
혼자 조용한 성전에서 따져묻듯 눈물을 흘릴 곳이 생겨 너무 다행이었다.
이러다 내가 성소를 받아 수녀가 되면 어떨까부터
나는 그저 혼자 사는것이 돕는 것이야 라며 고립만을 택했다.
나는 어릴적부터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부~~~자 한테 시집갈거야. 난! 꼭!! 그래서 골프도 치고 여유롭게 돈쓰면서 살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다. 부자에게 시집가는 삶이 꿈이였다니 말이다.
물정모르고 떠들던 나의 24살은 그렇게 다른색으로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