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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안 해도 괜찮아

by Ahnyoung

얼마 전.
저녁도 못 먹고, 밤 9시가 넘어 자기 덩치만 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터덜터덜 들어오는 아이를 보았다.안쓰럽다 못해, 슬펐다.

어른이 되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지금보다 훨씬 무거워질 텐데, 엄마 아빠 품 안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조금 편하게, 조금 무용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중학생은 쓸데없는 짓도 하고, 건설적이지 않은 일도 하면서 세상을 탐구하고 알아가는 시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원하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아이의 작은 소망을 함부로 내려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중3이 된 아이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편의점 간식으로 대충 때우며 학원을 오갔다.
그런 모습이 늘 체한 것처럼 명치에 걸린 듯했다.

그날 밤, 허겁지겁 저녁을 먹는 아이를 보다 못해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고등학교 갈 수 있어.

요즘엔 미달이래! 그냥 좀 쉬엄쉬엄 해."

"엄마, 나 미달로 고등학교 들어가기 싫어."

"미달로 들어간 거 아무도 모르는데, 뭐 어때."

"내가 알잖아, 엄마. 난 다른 사람 아니고

나한테 떳떳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아이의 시선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어 애쓰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을 타인의 시선에 기대어 결정했는지 돌아보게 됐다.

'남들이 모르는 걸 뭐 어때' 하는 말이 너무 쉽게

입 밖으로 나온 나를 보며, 내 수준에서 어떻게 이런 아이가 나왔을까, 고맙다가도 미안해졌다.


아이니까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강제로

공부를 시킨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는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했고,

그냥저냥 지내다가 고등학교를 앞두니

불안해했다. 학원에 보내달라고 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아이를 키울 거라면, 시키는 게 맞았나 싶다가도,
아이와 함께한 시간들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고,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는 힘을 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그것이 진짜 공부라고 믿는다.

비록 지금 학교 공부를 잘하지는 않아도,

바라던 대로,

원하는 대로 잘 커준 것 같아 안도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언젠가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래도 후회하고, 저래도 후회해!

완벽한 선택은 어차피 없어."

그래서 나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의 글, 아이와의 대화, 아이가 음악과 그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나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다.

소망하던 대로 잘 커줬으니 됐다.
아이를 키울수록, 아이에 대한 믿음도 함께 커간다.

세상의 기준으로 대단하지 않더라도,

분명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줄 아는 멋진 사람으로

자랄 것이다. 자기 몫을 다하는 어른이 될 것이다.


며칠 후.

또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를 보며,
남편이 아주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다.

"00야, 공부 너무 열심히 안 해도 돼.
00가 컸을 때는 지금이랑 또 다른 세상일 거야.
지금은 전부라고 생각하는 게,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어."

15년을 함께 산 남편인데, 나는 또 한 번 반했다.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 한마디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처럼 주절주절 길게 늘어놓지 않아서인지,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이렇게 가볍지만 진심 어린 한마디가,
더 큰 위로가 되는 것 같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부족하다', '이러다 대학 못 간다'는 말을 매일 듣는 아이들에게

가끔은

"너무 열심히 안 해도 돼"라고 말해주면 어떨까.

잔소리가 되지 않게, 아이 아빠처럼 담백하게!

그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아이들의 마음은 아주 조금 가벼워질 것이다.

이미 누구보다 스스로를 알고 애쓰는 아이들에게,
가볍지만 진심 어린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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