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유의 시작
스물다섯
비교적 이른 나이에 첫 아이를 낳았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친구들을 만나 축하파티를 했다.
이미 2주 전 생리가 멈춰 테스트기로 임신 사실을
확인했고 병원에서 아직 너무 초기라 확인이 어려우니
2주 뒤에 오라는 말을 듣고 간 터였다.
친구들은 초음파 속 아기가 너무 작아 올챙이 같다고 해서
나를 올챙이 엄마라고 부르며 축하해 줬다.
어리고 철없는 시기였지만,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과
위대함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앞날이 두렵기도 했지만 나에게 찾아온 생명이
신기하고 조금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파티를 마치고 초음파 사진을 들고 엄마에게 갔다.
밤 11시쯤
자고 있는 엄마를 깨워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엄마는 피곤하다고 내일 얘기하라고 했지만
나는 당장 말하고 싶었다.
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내일까지 견딜 자신이 없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엄마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목소리로 초음파 사진을 건네며
"엄마 축하해! 할머니 됐어"라고 말했다.
내 남자친구의 존재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던 엄마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내 등짝을 쌔게 후려쳤다.
"네 인생 이제 끝난 거야, 앞 길이 얼마나 창창한데
조심 좀 하지 그랬어!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공부시켰더니"
엄마는 말도 다 마치지 못하고 울었다.
왜 나는 그런 방법을 선택했을까? 그런데 그게 나였다.
나는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엄마에게 소식을 알렸다.
사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기도 했다.
20살에 나를 낳고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한 엄마는
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 엄마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길 바랐던 일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특히나 첫째 딸은 엄마 인생 닮는다고
엄마는 걱정하며 자주 얘기했었다.
엄마의 삶이 녹록지 않았기에 엄마는
내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랐을 거다.
그때는 나의 철없는 행동과 말이 얼마나
엄마를 아프게 했는지 몰랐다.
그리고 한동안 엄마는 나를 외면했다.
나는 입덧이 심했고 힘들었지만 엄마는
내게 느끼는 배신감과 슬픔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자유를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엄마가 내 인생이 끝났다고 말했는지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자신처럼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느라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수많은 생각과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사실을 받아들였다. 일주일쯤 뒤
"임신은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하늘이 허락한 일이니 잘 준비해 보자 늦었지만
축하한다"
엄마의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문자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입덧은 더 심해졌다.
24시간 멀미하는 기분에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내 잃어버린 자유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