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일주일 뒤 정기검진을 하러 병원에 갔다.
기본 검사 후 피를 뽑고 집에 가는 중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오셔야겠어요"
남편과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다시 병원으로 갔다.
의사 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있다가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다고 출산이 힘들 것 같다고 하셨다.
지금 바로 중절 수술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여기서는 계속 진료도 볼 수 없고 출산도 할 수 없다고 하며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라도 출산을 원하면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셨다.
나는 큰 병원으로 가보겠다고 했고 의사 선생님은 빠르게
소견서를 써주면서도 염려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셨다.
내 혈소판 수치가 다른 사람의 1/10도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고 아프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낳고 싶었다.
본 적도 없는, 갑자기 찾아온 이 아기를 왜 그렇게 지키고 싶었는지
모성이라는 게 본능처럼 존재하는 건가 싶었다.
출산을 하더라도 엄마의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아서
기형아를 낳을 확률도 높고, 엄마가 잘못될 수도 있다며-
의사 선생님은 내가 맞이할 수도 있을 최악의 상황에 대해 모두 얘기하셨다.
그런데 무감각하다고 여겨질 만큼 그런 말들이 그냥 말들뿐인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큰 고민 없이 병원으로 갔다.
감사하게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응급으로 빠르게 진료를 볼 수 있었다.
혈액내과와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을 마주하자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낳고 싶냐고,
(아마도 어린 나를 딸처럼 생각하며 물으셨던 것 같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해봅시다"라고 하셨다.
그 네 글자가 너무나 커다랗게 느껴졌다.
그 후로 나는 혈액내과와 산부인과를 오가며
힘들지만 기대하며 아이를 만날 준비를 했다.
이제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잃어버린 첫 번째 자유는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입덧은 갈수록 심해졌고 나는 앙상한 팔다리에
계속 배만 부풀어 갔다.
그래도 기특하게 아기는 잘 자랐다.
때로는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 괴로웠지만
아이의 태동이 마치 힘내라고 격려해 주는 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아이의 존재가 또렷하게 느껴질수록 25살짜리 엄마의 마음에도
모성이 더 깊이 있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진짜 엄마가 돼 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남들보다 자주 병원을 오가며 계속 검사하고 결과 듣고
또 검사하고 기다리며 마음 졸였던 시간을 지나
37주에 출산했다.
어려서 몰랐을까? 무지해서 그랬을까?
검진을 갔더니 선생님이 놀라셨다. 자궁이 3cm가 넘게 열려있는데
아프지 않았냐며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와서 집에 다녀와도 되냐고 묻자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힘을 내야 아기가 나올 때 덜 힘들다는 말이 기억나서
그럼 밥이라도 먹고 오겠다고 허락을 받고 남편과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설렁탕 한 그릇을 꾸역꾸역 다 먹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나는 자연분만이 더 안전한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입덧도 심하고 몸이 아파 만삭에도 50kg이 넘지 않았던
나는 국밥 한 그릇을 다 먹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꼭꼭 씹어 열심히 먹었다. 한 그릇을 다!
나의 두 번째 모성이 발현된 순간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