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말 한마디가 그리운 계절
아기를 키우는 시간은, 더군다나 신생아를 키우는 시간은 때로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반복되는 일상과 지칠 대로 지친 몸,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한 없이 나의 부족함과 못남을 대면하게 되는
시간과 같다.
그날도 그랬다. 우는 아기와 함께 울어버린 날.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집에 잠깐 오겠다고, 수화기 건너편으로 들리는 오랜 친구의 목소리가
너무 달갑게 느껴졌다. 순간 '아, 내가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 싶었다.
아기를 낳아본 적도, 아직 아기 낳은 친구를 본 적도 없는 내 친구는 아가방(그때까지는 길거리에 아가방 매장이 있었다)에서 파는 딸랑이 세트 하나를 사들고 왔다. 원래 무뚝뚝한 녀석인데 그걸 들고 들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갑자기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와서 아기 옆에 앉아서는 별 말도 없이 그냥 아기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고 나는 친구가 아기를 잠깐 봐주고 있는 동안 밀린 설거지를 후다닥 해냈다. 빨래도 갰다.
어디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거라며 친구는 잠깐 내가 할 일을 할 동안 자리를 지켜주고는 금세 일어섰다.
그러면서 "진짜 작고 귀엽다잉" 하더니 못 참겠다는 듯이 아기 볼에 뽀뽀를 했다. (지금 같았으면 백일해도 안 맞은 년이 하면서 욕을 한 바가지 했을 테지만, 그때는 몰랐다. 어려서, 몰라서 실수한 부분들이 참 많은데 건강하게 잘 자라준 아이에게 고맙다.)
저 무뚝뚝한 녀석이 아기를 정말로 귀여워하는 게 느껴져서 또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외롭고 슬프다고 느꼈던 내 감정은 이 친구 하나로 완전히 역전됐다. "현관문 앞에 서서 몸 잘 챙기라잉" 한 마디 던지고 사라졌지만 그 친구의 여운은 그날 내내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
잠깐이지만 그냥 묵묵히 옆에 있어준 게, 별 거 아닌 따듯한 말이 그렇게 좋았다.
그리고 며칠 뒤 체력이 다 떨어진 탓인지 고열에 감기 증상으로 매우 아팠다. 우는 아기를 안고 서 있을
힘조차도 없었고 젖몸살 때문에 몸에 힘도 다 빠진 상태였다. 아기를 안고 소파에 앉으면 울고, 일어서면
어지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종종거리다가 멍하니 서 있다 보니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잠시 아기의 울음소리가 노이즈 캔슬링 된 것 같았고,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남편도 있고,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하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엄마 나 너무 아픈데 지금 와주면 안 돼?"
"엄마 지금 일하는 데 어떻게 가, ○서방한테 전화하든지 아님 약 먹고 좀 참고 있어. 지금부터는 네가 스스로 해야 돼. 매번 누가 도와주고 그럴 수 없어 네가 선택한 거니까 참고 견디는 것도 해야 돼"
알고 있었다. 내 선택이라는 걸, 그런데 남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그냥 정말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도 엄마가 됐지만,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은 날들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있게 해 주고 키워준
(때로는 미숙한 사랑으로 키웠다 해도) 엄마가 간절한 날들이 있다.
차가운 엄마의 말이 서러워 또 울음을 터트렸다. 아기를 안고 서서 울고 또 울었다.
알고 있다. 마음이 약한 나를 강하게 하려고, 도와주려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래도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따듯한 말이 필요한 계절이 있다.
"많이 아프니, 지금 못 가서 어쩌지, 일 끝나는 대로 갈게 밥은 먹었니?" 와주지 못해도 따듯하게 얘기해 줬다면 내 가슴이 덜 시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엄마의 사랑방식은 어디서 온 걸까? 엄마의 엄마가 그랬겠지. 아기를 키우면서 느낀다.
받은 적 없는 것을 주는 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사랑해, 우리 공주, 예쁘다" 이런 말들을
들어 본 적 없는 내가 아기에게 주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차갑게, 모질게 대했으나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 엄마의 마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나보다 더 이른 나이에 나를 낳고, 온갖 시댁식구들을 다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던 엄마는
자신이 삶이 좀 나아지고 나서야 자식이 예쁜 게 보였나 보다.
내 아기의 돌잔치 날
예쁜 드레스를 입은 아기와 나를 보고 엄마는 내 친구에게 물었다고 한다.
"내 딸이 예쁘니? 윤영이 딸이 예쁘니?"
"○○가 예쁘죠!" 친구가 아기가 더 예쁘다고 너스레를 떨자 엄마는
"그래? 나는 내 딸이 더 예쁘네." 라며 울고, 웃었다고 한다.
무지해서 던진 우리의 말들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많은 슬픔이 되는지 생각해 본다.
때로 그게 사랑이었다 해도 차가운 말 뒤에 가려진 사랑은 상대에게 닿을 수 없다.
살아가며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따듯한 말이 필요한 계절이 있다.
어느덧 내 키보다 자란 아기는 사춘기라는 계절을 겪고 있다.
그 계절을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오늘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