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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그때는 죄송했어요...

한 꼬마아이의 반성문

by 호수공원

우당탕탕!! 아이들과 정신없이 육아를 하다 보면 나 역시도 아이들과 똑같이 다치고 넘어지고 깨지기 일쑤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출산 또한 고령의 산모이다 보니 깡마르고 허약한 몸 탓에 병원 신세를 지는 것도 부지기수이다. 그럴 때마다 혹사당하고 있는 내 발을 보고 있노라면 짠한 마음이 든다.

첫 아이 출산 후 발가락 골절서부터 둘째 아이 출산 후 발등 골절에 인대파열까지, 몇 주전에는 예전에 골절당한 발가락을 세게 부딪혔다. 남들보다 기다란 내 발가락에 선명한 멍자국이 들었다. 그래도 골절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추운 날씨에 올해 겨울에 장만한 어그부츠를 신었다. 다른 부츠보다 두툼한 것이 보온성이 좋을 것 같아 일단은 합격시키고 밖에 나가 보았다. 폭신하니 좋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멍이 든 발가락이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욱신욱신 아려왔다. 그 부츠를 벗자마자,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신발을 팔았던 한 아저씨, 한 청년에게 한없이 미안했던 지난날 철없었던 나의 행동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릴 적 도심에 살았던 나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언니가 학원이라도 가는 날이면 나는 혼자였다. 늘 혼자 있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운 탓에 분리 불안도 심했던 나는 엄마가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도 꼭 따라가겠다고 고집과 떼를 쓰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럴 때면 엄마는 귀찮으련만 항상 나를 친구들 모임에 데리고 갔다.

여덟 살, 국민 아니 초등학생이 된 나는 그날도 엄마와 함께 집에 가는 날이었다.

엄마는 집에 가다가 별안간 신발을 사주겠다며, 길거리에서 신발을 파는 곳에 나를 데려갔다.

주인은 지금 생각해 보면 제법 젊은 사람이었다. 내 눈에 아저씨로 보이는 그는 보청기를 끼고 있었고 옹알이하듯 더듬더듬 말을 하였다. 엄마와 그 아저씨는 좀 아는 듯했다. 장애를 가진 그를 도와주려는 엄마의 선심과는 달리, 당시에 나로서는 도대체 엄마와 그가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알 수도 없었다. 여태껏 보아 온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한 그 아저씨가 낯설었고, 덩치도 있어 무서웠다. 엄마는 나한테 맞는 신발을 사고, 나보다 한 치수 큰 언니 것도 같이 샀다. 그렇게 엄마는 신발을 살 일이 있으면 나를 데리고 보청기를 낀 그 아저씨에게 사러 갔었다. 당시 엄마 껌딱지였던 나는 싫은 내색도 못 하고 그냥 말없이 엄마 옆에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과 후 집으로 오다가 그 신발가게를 지나쳤다. 신발가게 아저씨는 나를 몇 번 봐서 그런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엄마도 없이 혼자 있었던 나는 마치 무서운 영화 속에 괴물을 본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도망을 가듯 냅다 뛰었다. 그 아저씨는 그런 나를 쫓아왔다. 그리고 그냥 지나쳐 버린 나를 보고 약간 화를 내다가 울먹일 듯 한 나를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 신발을 팔던 그 아저씨를 다신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로 인해 상처받고 그곳에서 장사를 접은 아저씨의 속도 모르고, 나는 다행이라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 철이 들 무렵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날의 일이, 그와 같은 사람을 볼 때면 불쑥 예전 일이 떠올랐다. 그 아저씨에게 진심으로 사과 한 마디 못한 것이, 열심히 살려고 한 청년의 밥줄을 끊어 버린 지난날, 나의 철없었던 행동에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꼬맹이에서 어른이 된 내가 결혼하기 전 초등학교 방과 후 강사 시절, 내가 일하던 초등학교에서는 다문화 가정, 장애 학생도 다 같이 생활하는 학교였다. 나는 수업하는 교실에서 내 수업을 듣는 1학년 한 여자아이와 교과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복도에서 한 장애 학생이 우리 옆을 스쳐 갔다. 그 여자아이는 “선생님, 무서워요.”라고 말했다. 나는 어렸을 적 내 모습을 그 여자아이를 통해 보고 있었다.

“○○야, 저 아이는 우리랑 좀 다르게 보일 뿐이지, 무서운 아이는 아니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해 주었다.

그날 이후 그 여자아이는 장애가 있는 그 학생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의 말 한마디로 달라진 그 아이를 보며, 예전에 신발가게 아저씨한테 들었던 죄책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나는 결혼을 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작년에 아이들과 한 박물관에 갔었다. 그 박물관 1층에는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상어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상어책을 몇 권 손에 쥐어주고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아들은 5학년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아이와 같이 책을 보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아들에게 상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어눌한 말투에 발음을 좀 뭉개서 하였지만 어떤 말을 하는지 대충은 알 수는 있었다.

“상어 중에는 백상아리가 가장 힘이 세지만, 그런 백상아리를 공격하는 것은 범고래야.

보기에는 순해 보여도 아주 난폭한 녀석이지.”

“너 참 똑똑하구나!”라는 나의 말에 그 남자아이는 신이 난 듯 책 한 권의 분량을 따다다다 쉴 새 없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아들은 그 남자아이가 해주는 상어 이야기를 제법 흥미 있게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나 집으로 갈 때, 아들은 그 남자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 남자아이는 아들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멀뚱멀뚱거리기만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자폐’를 가진 아이였다.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나오는 우영우와 같은 천재 자폐, 서번트 증후군의 아이였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상어 책을 보고 있는 동안 어디선가 날카로운 한 아주머니의 시선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남자아이의 엄마였다. 장애아이를 둔 엄마로서 자신의 아들을 보는 곱지 않은 시선들 속에 노심초사하며 ‘나’라는 사람 또한 아이에게 해가 될까? 하며 매서운 시선이 잠깐 나에게 꽂혔다. 그 아이를 보며 아들이 인사를 할 때, 그 아이 엄마의 시선은 한결 누그러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라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다른 그들을 차별하고 멸시한다. 내 발이 고생할 때마다 목발과 깁스를 하며 절뚝거리며 거리를 거닐 때에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차가운 시선들 때문에, 혹시나 하며 아이들과 같이 걸을 때면 적잖이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아름답고 화려한 것에 뇌가 반응을 보이며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와 다르다고 그들을 배척하는 것은 안타깝고 씁쓸한 현실이다. 우리와 좀 다른 그들을 볼 때 눈에 씌어지는 차가운 냉소의 시선, 지나친 동정의 시선을 한 꺼풀 벗겨내고, 다른 일반 사람들과 동등한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따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도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2021년에는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개정되었다고 한다. 장애인들이 불편한 삶을 극복하고 부당한 차별에서 벗어나 행복할 권리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불어살자.jpg

<장애인, 비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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