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가득한 마츠마에로 떠나는 여행
해마다 봄이 되면 홋카이도의 벚꽃 여행지로 소개되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마츠마에松前이다. 지금은 마츠마에를 가려면 보통 하코다테에서 버스 혹은 자동차를 이용하지만 오래전에는 마츠마에 선松前線이라는 철도 노선이 있었고 이 노선을 이용해서 마츠마에를 갈 수 있었다.
마츠마에 선松前線은 노선 길이 50.8km로 에사시 선 상의 키코나이역木古内駅에서 분기해서 마츠마에초 마츠마에역까지 이어졌다. 개통일은 1937년 10월 12일이다. 요시오카 부근까지 쓰가루 해협선과 병행하고 있었으며, 요시오카에서 카이쿄선과 교차하여 마츠마에로 이어졌다. 개통 이후 50여 년 동안 운행되던 마츠마에선은 일본 국유 철도에서 JR 홋카이도로 이관된 직후인 1988년 2월 1일에 폐선되었다.
이 노선은 당시 군수물자(망간)등의 채굴을 위해 건설된 노선으로 1937년 키코나이에서 오시마시리우치까지 개통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공사가 재개되어, 1953년 마츠마에까지 개통함과 동시에 마츠마에선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수익성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1980년 제정된 국철재건법에 의해 1984년 제2차 특정지방교통선으로 지정되었고, 나란히 달리던 국도 228호 선의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결국 JR 홋카이도에 이관된 다음 해인 1988년에 폐선되었다. 원래 계획상으로는 망간 채굴을 위해 마츠마에역에서 마츠마에정의 오시마지구(大島地区)까지 추가로 24km 정도를 연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노선도 왼쪽의 붉은 점선 표시 구간) 태평양 전쟁 패전 후 필요성이 없어짐과 동시에 폐기되었다.
폐지되기 전 마츠마에 선의 열차가 운행하던 모습
이 노선에 있던 역들은 키코나이, 모리코시, 오시마시리우치, 오모나이, 유노사토, 센겐, 오시마후쿠시마, 시라후, 오시마요시오카, 오시마오사와, 오요베, 마츠마에역이다. 이제 지금은 사라진 노선 마츠마에선의 역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JR키코나이역木古内駅 은 홋카이도 가미이소군 기코나이정에 있는 홋카이도 여객철도 홋카이도 신칸센과 카이쿄선(해협선), 도난 이사리비 철도 도난 이사리비 철도선의 철도역이다. 카이쿄 선 개업 이전에는 마쓰마에선의 접속역이었다. 1930년 10월 25일에 일본 국유철도의 일반역으로 개업했다. 당시에는 에사시선의 종점역이었다. 2016년 홋카이도 신칸센 개업에 따라, 에사시 선 구간이 도난 이사비리 철도로 이관되었다.
역명은 키코나이역에서 있는 마을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키코나이라는 지명은 홋카이도 지명 대부분이 그렇듯이 아이누어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의 기코나이 강이, 간만의 차가 심하고, 만조시에 조수가 강을 역류하는 것으로부터 「リリオナイ(リロナイ)리리오나이(리로나이)」(파도·넣다·강: 조수가 들어오는 강)라고 불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키코나이역 다음 역은 모시코시역森越駅이다. 모시코시역은 홋카이도 카미이소군 시리우치정에 있었던 역으로 1938년 10월에 개업했다. 개업 이후 역무원이 배치되고 화물도 취급했으나 1970년에 화물취급이 중지되고 역도 무인화되었다. 이후 1988년 2월에 마츠마에선이 폐선됨에 따라 폐역 되었다. 역 주변에는 나카노사와 어항(中の川漁港), 시리우치초 문화교류센터, 하코다테 버스 문화교류센터(文化交流センター) 정류장이 있다.
모시코시 다음 역은 오시마시리우치역渡島知内駅이다. 홋카이도 카미이소군 시리우치정에 있었다. 개업할 때 도호쿠 본선에 이미 시리우치역(尻内駅; 現 하치노헤역)이 있었기 때문에 앞에 오시마(渡島)를 붙였다. 1971년에 도호쿠 본선 역명이 하치노헤역으로 바뀌었음에도 이 역은 역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폐역 된다. 그 뒤 1990년에 카이쿄선 신유노사토 신호장(新湯の里信号場)이 역으로 승격되면서 시리우치역(知内駅)이 되었으나 2014년에 다시 신호장으로 격하되었다가 2016년에 유노사토시리우치 신호장으로 바뀌었다.
개업 당시 종점이었으며 그다음 해에 고반자카역까지 연장되면서 중간역이 된다. 화물취급도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1984년에 중지되었고 1986년에는 무인역(간이위탁역)이 된다. 1988년 마츠마에 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역 주변은 시리우치정의 중심으로, 시리우치 정사무소, 시리우치 향토자료관, 하코다테 버스 시리우치출장소(知内出張所) 정류장 등이 있다.
역명은 마을 이름 시리우치에서 유래되었다. 시리우치는 아이누어의 '시르오티(cir-ot-i)'에서 시르오시(cir-oci)'(새, 모여사는 곳)에서 유래되었다. 에도시대 마쓰마에번의 주요 재원의 하나였던 도쿠가와 쇼군가에 진상하는 15마리의 매사냥용 매의 산지이며, 그 절반 이상은 시리우치에서 포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시마시리우치역 다음 역은 오모나이역重内駅이다.
역명이자 지역명은 아이누어로 '강어귀가 막힌 강'을 뜻하는 '옴나이(オムナイ)'에서 따왔다. 마츠마에 선 역들 중에서 가장 늦게 개통했으며(1962년) 여객취급만 이루어졌다. 1988년 마츠마에 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역 주변은 농경지이며 민가가 산재해 있다. 그 외에 오모나이 신사, 오모나이 전망대 등이 있다.
오모나이역 다음은 유노사토역湯ノ里駅이다.
유노사토역은 급행 마츠마에(松前)의 정차역이었으며, 화물취급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1980년에 급행 폐지, 1984년에 화물취급이 중지되었고 1986년에 완전 무인역화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88년 마츠마에 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이곳은 아이누어로 '(수심이) 얕은 연어 산란장(이찬/ichan)'을 나타내는 '하기차니(hak-ichani)'에서 '하기사리'로 불렀다. 이 역이 개설되기 전인 1929년에 주변 지구와 지명의 통합·정리가 이루어져 지구 내에 있는 시리우치 온천에서 '유노사토'로 개칭되었다.
유노사토 다음 역은 센겐역千軒駅이다.
센겐 역은 홋카이도 마츠마에 군 후쿠시마정에 있었다. 개업 당시에는 고반자카역(碁盤坂駅)이었으며 노선의 종점이었으나 4년 뒤에 오시마요시오카역까지 연장되면서 중간역이 된다. 1972년에 역명을 '센겐'으로 바꾸었고, 1984년에 화물취급이 중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88년 마츠마에 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역 주변은 작은 숲 속 마을로, 센겐 간이 우편국, 센겐 신사 등이 있다.
역명은 이 역이 있었던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지명은 부근에 존재하는 산 '다이센겐다케(大千軒岳)'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1628년 이 산에 금광이 열렸고, 개발로 천 채의 인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센겐역 다음 역은 오시마후쿠시마역渡島福島駅이다. 오시마후쿠시마역은 후쿠시마초의 중심역이었고 준급(→급행) 마츠마에(松前)도 정차했으나 1980년에 폐지되었다. 1984년에 화물취급이 중지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은 1988년 마츠마에 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역 주변에는 후쿠시마초 정사무소, 묘렌지(妙蓮寺), 후쿠시마 어항(福島漁港), 후쿠시마초 세이칸 터널 기념관 등이 있다.
오시마후쿠시마역 다음 역은 시라후역 白符駅이다. 역명의 유래가 된 지명은 아이누어로 '새가 많은 곳'을 뜻하는 '치로프(チロプ)'에서 따왔다. 화물취급 없이 여객열차만 정차했으며, 1988년 마츠마에 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폐선 이후 승강장과 선로는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승강장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철교 교각, 대합실로 쓰였던 흰색 건물만이 남아있다. 역의 양 옆에 있던 터널은 콘크리트로 입구가 완전히 막혀있다. 역 주변에는 시라후 간이우편국, 수산물 가공공장, 시라후다이진구(白符大神宮) 등이 있다.
시라후역 다음 역은 오시마요시오카역渡島吉岡駅이다. 1942년에 개업했고, 1988년에 폐역이 되었다. 현재 역이 있던 곳은 채석회사의 작업장이 들어서 있다.
오시마요시오카 다음 역은 오 사마오-사와 역渡島大沢駅이다. 영업 당시 홋카이도 최남단 역이었으며 폐역 후 키코나이역으로 잠깐 타이틀이 넘어갔다가 한 달 만에 세이칸 터널 개업으로 요시오카 해저역(비상설), 시리우치역(상설)이 최남단 역이 되었다.
급행은 정차하지 않았으며 화물을 취급했으나 다른 역들보다 20여 년이나 빠른 1961년에 화물취급이 중지되었다. 1970년에 무인화되었으며 1988년 마츠마에 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다른 역보다 쇠퇴의 역사가 빨랐는데, 1981년 기준으로 일평균 이용객이 44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이용객이 적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역이 고지대에 위치한 데다가 마을의 주택을 다 합쳐봐도 5~60채 남짓이라 수요가 나올 수가 없었다.
역 주변에는 이나리 신사(稲荷神社), 시라카미 주재소, 시라카미 우편국 등이 있다. 역 양 옆으로 아라야카와 교량(荒谷川橋梁)과 히츠노시타가와 교량(櫃の下川橋梁)이 있었으나 현재 선로는 모두 철거되고 교각만이 남아있다.
오시마오사와역 다음 역은 오요베역及部駅이다. 1957년 개업 당시부터 역무원이 배치되지 않는 무인역이었다. 화물취급 없이 여객취급만 이루어졌으며, 1988년 마츠마에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현재는 도로의 일부가 되었다.
자, 오요베역 다음 역이 마츠마에역松前駅이다.
지금의 모습, 역사와 선로는 철거되었지만 철거 당시에도 있었던 홋카이도 최남단 마을 마츠마에역이라는 비석은 남아 있다. 마츠마에 선 의 종점으로, 1953년 개업 당시부터 쭉 역무원이 배치되는 역이었다.
마츠마에초의 중심역으로, 1981년 일평균 이용객 425명을 기록할 정도로 로컬선의 역 치고는 이용객이 많았다. 역 스탬프도 비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0년에 급행이, 1984년에 화물취급이 폐지되며 노선과 함께 쇠퇴해 가다가 1988년 마츠마에 선 폐선과 동시에 폐역 되었다.
원래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24km 떨어진 하라구치(原口) 마을까지 연장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228번 국도를 따라 4km 정도 가면 연장을 위해 세워놓은 교각이 남아있다. 구글 지도에서 松前線延長部の橋脚跡라고 치면 나온다. 역 주변에는 마츠마에 중학교, 마츠시로 초등학교, 마츠마에 성 등이 있다.
자, 이 마츠마에선이 이어졌던 마츠마에는 어떤 곳일까? 마츠마에는 행정구역상 오시마 종합 진흥국에 속해 있는 홋카이도 최남단의 지자체이다. 해안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지는 남쪽 해안가에 위치한다. 쓰시마 난류의 영향으로 홋카이도에서 가장 온난한 기후를 보이며 평균적으로 겨울에는 -1도, 여름에는 23도 정도의 기온으로 기후로 보면 거주하기 좋은 환경이다. 지명인 마츠마에는 메이지 시대까지 이곳을 통치하던 마츠마에번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죠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면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1288~1295년 사이)에 승려 니치지(日持)가 포교를 위해 이곳을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 있었던 마츠마에 번에 대해 알아보자.
전국 시대에 다케다 노부히로(武田信廣1548-1616)가 지금의 오시마 반도 남부 지역에 세력 거점을 확보한 이래로 다케다 가문(후의 가키자키(蠣崎) 가문)은 일본과 에조(홋카이도의 옛 이름)와의 창구 역할을 하며 성장했다. 가키자키 가문은 16세기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여 오시마 반도의 지배권을 인정받고 북방 세력인 안도 가문으로부터 명실상부하게 독립할 수 있었다. 1599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종하여 에조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받았고, 이 무렵 가키자키 요시히로는 성씨를 마츠마에(松前)로 바꾼다. 1605년에는 에조와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받았다.
당시의 홋카이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츠마에 번은 고쿠다카(石高)가 없는 다이묘였고, 나중에 1만 석 '격'(格)으로 불리는 것도 상업적 이익을 곡물 산출량으로 추산하여 지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마츠마에 번에 있어서 에조와의 무역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고, 번이 직접 상업 경영을 하거나 가신 등에게 위탁하여 교역을 행하고 그 이윤을 일부 취하는 식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번은 오시마반도 남부를 와진치(和人地), 그 이외의 에조가 거주하는 공간을 에조치라고 하여 두 지역 간의 교류를 엄격히 규제했다. 상업 외에도 어업이 흥했으나, 와진치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게 되면서 에조치로 건너가 어업을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에도 막부 시대 말기 러시아 세력이 남하하여 일본과의 통교를 요구하고 영토 분쟁이 심화되자, 막부 측에서는 북방에 대한 대응을 일개 번에게 맡기기 어렵다고 판단, 1807년 마츠마에 번은 무쓰국 야나가와번으로 이봉되었고, 번의 영지는 막부의 직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821년 정책의 전환으로 마쓰마에 번은 영지를 반환받았고 에조치 일대의 지배와 북방경비의 권한을 재위임받았다. 그러나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어 하코다테가 개항되면서 마츠마에 번 일대의 중요성이 한층 강화됨에 따라 번은 에조치 동부 영지를 다시 반납했고, 대신 야나가와 등의 다른 지역 영지를 추가로 받아 3만 석이 부여되었다. 1864년에는 반납되었던 동부 영지 중 일부가 다시 소속되었다. 일본 최후의 내전이라고 하는 하코다테 전쟁 때는 신정부군 측에 섰다. 이 무렵 다테 성館城을 새로 짓고 거점을 이동한 뒤 다테 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테성의 터,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다테성은 마츠마에에서 북동쪽, 에사시에서는 동쪽에 있었다.
이 성은 1868년 마츠마에번 번주, 노리히로가 세웠다. 마츠마에번의 시모노쿠니 도시치로가 메이지 신정부의 허가를 얻어 1868년 9월 완공했는데 원래는 삼중 성곽에 포대를 갖춘 본격적인 성채로 설계되었으나, 주변 정세의 불안함으로 인해 일단 토루를 쌓고 판재로 건축물을 세워놓는 식으로 지어져 55일 만에 완공되었다. 그 해 10월, 구 막부군이 상륙하여 고료가쿠를 점령하고 마츠마에 성을 향해 진격해 오자, 마츠마에 번은 번주와 가신들을 다테 성으로 보내고, 마츠마에 성에 400명의 군사를 두어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11월 5일, 마츠마에 성을 함락시킨 구 막부군이 이어서 다테 성을 노리자, 번주 노리히로는 10일 만에 성을 떠났다. 두 배나 되는 구 막부군에 맞서 미카미 조준의 지휘 하에 마쓰마에 번의 군사들은 항전했으나, 결국 다테 성은 함락되었고 이때 소실되었다.
이후 하코다테 전쟁이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난 후 1869년 14대 번주 마츠마에 가네히로가 번명을 다테 번으로 개명하고 판적봉환을 자원하여 다테 번의 지사가 되었다. 다테 번은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다테현이 되었고, 일부는 홋카이도, 일부는 아오모리현이 되어 소멸하였다.
*에조치
에조치( 蝦夷地, えぞち)는 일본 에도시대에 에조라 불린 아이누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시마 반도를 제외한 홋카이도 전역과 사할린섬, 쿠릴열도까지를 포함한다. 이 용어는 마츠마에번의 마츠마에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에도 막부로부터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 교역권을 인정받고, 당시 일본인이 거주하던 번의 직할 영지인 오시마 반도 일대를 와진치(和人地)로 부르면서, 와진치는 에조치에 대치되는 용어로 등장하였다.
특히, 홋카이도 동부와 쿠릴 열도는 동에조치(東蝦夷地), 홋카이도 서부와 사할린섬 일대는 서에조치(西蝦夷地)로 불렸다. 1799년에는 동에조치가, 1807년에는 서에조치가 막부(마쓰마에 부교) 직할령이 되었고, 1821년 양 에조치는 다시 마쓰마에 번에게 돌아갔다가, 1855년 다시 막부(하코다테 부교)의 직할 하에 들어갔다. 1869년 8월 15일 에조치는 홋카이도(北海道)로 개명되었다.
마쓰마에는 일반적으로 북쪽의 작은 교토라고 불리우는데 이런 애칭은 일본 각지에 성이 있거나 에도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어김없이 붙는 것이라 특별할 것은 없지만 마쓰마에성 주변의 벚꽃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벚꽃 명승지이다. 사실 지금의 홋카이도는 삿포로가 중심이고, 남부지역도 하코다테가 주요 도시이지만, 에도시대만 해도, 홋카이도의 중심지는 번청이 있는 마쓰마에였다.
마쓰마에성은 일본식 성곽으로서는 나가사키의 이시다성과 함께 일본 역사(에도시대 말기)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성이자, 홋카이도에서는 성으로 하코다테 전쟁(무진전쟁, 혹은 보신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에도시대의 공식 명식은 후쿠야마성 福山城이지만 빈고 후쿠야마성과의 명칭의 혼란이 있어 마쓰마에성이라고도 불렀다. 마쓰마에는 마쓰마에 가문의 17대 번주(番主) 마쓰마에 타카히로 때인 1849년 외국 선박의 출몰에 대비하여 츠가루 해협의 경비를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막부로부터 성의 축성을 명 받았으나, 성을 이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주장이 많아 초대 번주인 마쓰마에 요시히로가 1606년에 축성한 기존의 성(후쿠야마관)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성을 축성하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 일본식 성이 건축되지 않은 이유는 홋카이도에는 아이누인 외에는 딱히 위협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착공한 지 5년의 세월을 거쳐 1854년 9월에 완성한 새로운 성의 면적은 약 7만 7800 ㎡로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망루 6, 성문 16, 포대 7좌를 갖추고 있었다. 1941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49년 6월 소실되었다. 지금의 천수각은 마을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과 전국적인 성원으로 1961년에 재건한 것이다.
1949년 화재가 일어나기 전의 마쓰마에성의 사진
현재 천수각은 마쓰마에 자료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갑옷과 의복 등 번정 시대의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마쓰마에성이 있는 마쓰마에공원 부지 내에서는 마쓰마에번 시대의 마을을 재현한 ‘마쓰마에한 야시키(마츠마에번 저택)’와 250종 약 8000그루의 벚꽃을 볼 수 있다. 또한, 축성 시부터 지금까지 현존하는 ‘혼마루 고몬’(本丸御門)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마쓰마에성은 콘크리트로 복원이 되었고 복원한 지가 60여 년이 흘러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다. 2010년 실제 조사 결과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진도 6의 지진에도 견딜 수 없는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후 오랜 논의 끝에 2018년 8월, 기존 콘크리트 천수각을 해체하고 에도 시대 말기에 지어졌던 목조 천수각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공사는 2018년부터 2035년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그나마 이렇게 목조복원화 사업이 가능한 이유는 1941년 국보 지정 시, 축소 모형과 당시 실측 지도, 공사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목조 복원이 불가능하고, 그나마 위의 사진처럼 화재가 나기 전의 사진이라도 남아 있다면 모를까, 사진도 안 남아 있으면 사실상 복원공사는 어렵다.
*에도시대의 성들은 대부분 메이지 유신 이후 폐성령에 의해 헐렸고, 이후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서 사라진 성(오사카, 나고야, 히로시마성 등)들 외에 에도시대의 천수각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을 현존 천수라 하고, 일본 내에서 12곳이 남아 있다. 이중 5곳이 국보이고 나머지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에도시대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시대에 건축된 마쓰마에성, 성은 완성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내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코다테 전쟁이 터지고, 구 막부군이 이곳을 공격하여 성을 차지했다가 다시 신정부군과 마쓰마에번병들이 다시 탈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다가 뜻밖에도 화재로 불타버린 비운의 성이기도 하다.
이런 마쓰마에성의 파란만장한 역사와는 달리 마쓰마에성(松前城)과 테마파크인 마쓰마에한 야시키(松前藩屋敷)를 포함하는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마쓰마에 공원은 벚꽃 명소로 유명하다. 특히 마쓰마에성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에는 약 250종 10,000그루의 벚나무가 늘어서 있어 '벚꽃 명소 100선'으로도 선정되었다. 원내에는 장미정원(バラ園), 모란정원(ボタン園)이 있으며 수국과 동백 등 벚꽃 이외의 꽃들도 피며, 벚꽃이 피는 시기에는 '마쓰마에 벚꽃 축제(松前さくらまつり)'가 열리며 특산물 전시회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홋카이도 여행 중 혹시라도 마쓰마에를 가고자 한다면 4월 하순부터 5월 초의 벚꽃이 피는 시기가 가장 좋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해안선을 따라 에사시까지 여행한 뒤 하코다테로 돌아오는 것도 괜찮다. 자, 이렇게 이제는 한때는 홋카이도 서남부 끝부분의 철도 노선이었던 마츠마에선과 마쓰마에성, 그리고 마쓰마에의 벚꽃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마츠마에의 벚꽃과 함께 기억되는 철도노선이었던 마츠마에선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