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사진
그의 책상 맨 아래칸에는 책 한 권이 들어 있습니다. 가끔 그는 그 책을 꺼내어 넘겨보는데 그가 그 책을 꺼내는 것은 책을 읽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 속에 끼워둔 사진 한 장 때문이었습니다.
조금 오래된듯한, 지금은 사진을 굳이 현상하기보다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컴퓨터 속에 보관하던지 아니면 개인 홈피에 올리는 게 대세이지만 그것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사진은 어느 봄날의 공원을 배경으로 한 몇 명의 여성들의 사진이었습니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 웬 여자 사진이냐고요? 혹시 숨겨 놓은 옛사랑 같은 거 아니냐고요? 지나간 옛사랑의 사진을 아내 몰래 간직하고 있을 만큼 그는 간 큰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 사진에는 모두 네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왼쪽에서 두 번째, 안경을 쓰고 있는 그 여자를 그는 가끔씩 사진을 꺼내볼 때 뚫어지게 쳐다보며 미소 짓곤 합니다. 지금은 미소 지으며 그 사진을 보지만 그 언제인가 한때에는 그 사진을 보면서 몹시 슬펐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2년 전쯤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결혼한 옛 친구의 집들이에 갔었는데 그즈음의 그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은 실연을 한 그를 위로하면서 챙겨주려 했었고 그는 만사가 다 귀찮았지만 결혼식에 가보지도 못했고, 친구의 아내를 만나본 적이 없어 인사겸 그의 집들이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우연히 다른 방에서 책상 위에 있던 사진첩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진첩의 주인공은 친구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별 뜻 없이 사진첩의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어린 시절부터의 사진이 역사의 기록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습니다. 그 페이지는 사진첩의 주인공의 대학 시절의 모습들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는 사진 속에서 보이는 어떤 여자의 모습을 보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습니다.
사진 속에 그녀는 얼마 전에 헤어진 그녀였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녀는 여러 장의 사진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그녀와 만나면서 그녀의 지난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순간의 느낌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웃었구나. 이런 때가 있었구나. 이렇게 바보스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이런 어이없는 포즈도 취할 줄 알았구나. 이렇게 촌스런 머리스타일을 할 때도 있었구나.
웃음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헤어진 사람의 흔적을 이렇게 발견하게 되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의 기록에서.. 그의 손이 떨리며 어느 한 장의 사진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그 사진을 어루만졌습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 잘 지내고 있는지?.... 이렇게나마...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이 사진 속에 웃고 있는 당신을... 그때 내가 만났더라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친구와 그의 아내는 놀라워했습니다. 친구의 아내는 대학 때 같은 동아리 활동을 했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늘 같이 붙어 다녔던 친한 친구였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부터 연락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 그는 친구부부를 만날 때마다... 그녀의 지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 1학년때... 수업을 빠지고 놀러 갔다는 이야기... 소개팅을 할 때의 이야기들... 그녀와 만나고 있을 때는 절대 들을 수 없었던 그녀의 숨겨진 지난 이야기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배려로 사진첩에서 그의 손길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사진 한 장을 가져올 수 있었는데 지금 그가 책 속에 숨겨두며 가끔씩 보는 사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사진을 다시 책 속에 끼워두고 서랍 속에 조심스럽게 넣어둔 다음 거실로 나갔습니다. 아내는 설거지를 마약 끝내고 난 뒤 커피를 그에게 건넸습니다.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걸친 아내는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습니다.
"가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당신도 대학 다닐 때.. 소개팅 많이 했었어?"
"어휴... 또 그 질문이야? 당신은 내 대학시절이 그리 궁금해? 이야기해 줬잖아... 소개팅은 별로 하지 않았어...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그리 없었고... 아니 왜 그렇게 내 소개팅이 그리 궁금한 거야? 도대체 이유가 뭐야? 잊을만하면... 그렇게 물어보는 거.."
"아니 별 뜻은 없어... 그냥... 궁금해서 그래... 당신은 별로 옛날이야기를 한 적이 없잖아..."
"뭐 특별히 이야기할 만 게 없어서 그래..."
그는 더는 묻지 않았고 아내를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습니다. 사진 속의 그녀는 대학 때 남학생들에게 은근히 인기가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남자친구다운 남자친구는 없었다고 하는데 겉으로는 편하게 보여도 막상 한걸음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쉽지 않은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문득 지금 그의 앞에서 앉아 있는 그녀보다.... 약간은 촌스러운 사진 속의 그녀가.... 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