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중사의 흔적을 찾아, 카가와현 아지초(2)
다시 영화의 내용을 따라가면 아키와 사쿠가 밤에 스쿠터를 타고 가다 상점가에서 멈춰 서서 전자 제품가게 앞에서 워크맨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곳은 아지항에서 빠져나와 도로를 조금 따라 걷다 보면 주택가가 나오는데 그 주택가속에 있는 타이쇼텐 谷商店이다.
영화 속에서 이곳은 아키야마 전기점이 있는 곳으로 나오지만 실제의 이곳은 의류등을 파는 가게였다.
사진에 보이는 오른쪽 가게가 바로 사쿠와 아키가 진열장에 전시된 워크맨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던 가게이다. 이 장면에서 아키는 사쿠에게 미드나잇웨이브라는 심야 FM 방송에 엽서 사연을 보내서 채택이 되면 소니 워크맨(영화 속의 가격은 3만 2천엔)을 선물로 준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쿠는 아키에게 그 워크맨을 선물해 주기 위해 사연을 써서 보내는데, 공교롭게도 사연의 내용이 아키를 연상케 하는 동급생 여자아이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알게 된 아키는 거짓말로 사연을 보내는 것에 크게 화를 내고, 사쿠는 사과를 하게 되는데 이 엽서의 내용이 그대로 아키에게 일어나고 말아 사쿠는 자신의 거짓사연이 아키를 병에 걸리게 만들었다고 크게 자책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이 영화의 주제가 히라이 켄의 눈을 감고 영상을 한번 보자,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노래와 함께 영화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gMark6SR-w
사실 백혈병은 순애보를 주제로 하는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이 앓는 단골병인데,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시기인 1986년과 1987년에는 백혈병을 제대로 치료할 수가 없었다.
드라마판을 보면 매회 마지막 부분에 백혈병과 관련된 메시지를 내 보냈다.
그 내용은 드라마의 1화에서 5화까지는 1987년 단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없었습니.-1991년 일본 골수은행 설립이라는 메시지가 나오고 6화에서 10화의 마지막에는 1987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무 부족했습니다. - 1991년 일본 골수은행 설립이라는 메시지가, 그리고 최종화에서는 2004년 지금이라면 혈액난치병의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1991년 일본 골수은행 설립이라는 메시지가 나온다.
이 영화로 인해 영화가 개봉되던 그해 일본 골수은행에 골수 기증에 관한 문의가 대폭적으로 증가했고 기증자 또한 사상 최대치가 될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두 사람이 즐겁게 스쿠터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의 촬영지는 아지초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기타야마 지구 北山地区의 도로이다.
아키와 사쿠가 스쿠터를 타고 가면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 이 장소는 훗날 어른이 된 사쿠가 아키가 보냈던 테이프를 들으며 걷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영화 속에 등장했던 그 도로에 섰다. 눈앞에 아키와 사쿠가 탄 스쿠터가 지나쳐 갈 것만 같았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교내 축제에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역을 뽑게 되는데 아키가 여주인공 역할로 뽑힌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대명사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바로 주인공 사쿠와 아키의 사랑이 결국 죽음으로 이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로미오와 줄리엣에 아키가 줄리엣역으로 뽑히게 되는 것, 사쿠가 보낸 거짓 사연의 엽서 속의 여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어간다는 내용 모두, 아키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촬영지는 오우지신사皇子神社이다. 신사 바로 앞에 이렇게 그네가 달린 작은 놀이터가 있다. 아지초와 항구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방파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영화에서 이곳을 함께 오른 사쿠와 아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시게 아저씨의 첫사랑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뒤 사쿠가 다시 아키의 흔적을 찾았을 때의 장면..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의 입구이다.
계단을 올라서면 아지초와 항구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키와 사쿠가 그네를 타던 장소의 실제 모습이다. 이곳의 난간 철망에는 이 영화를 보고 찾아온 수많은 팬들이 남기고 간 열쇠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들의 사랑이 오래오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텐데...
영화 속의 시게 아저씨의 사랑은 아키와 사쿠의 사랑과 절묘하게 흐름을 같이 한다. 시게 아저씨의 첫사랑 상대가 얼마 전 죽음을 맞이한 교장 선생님이었다는 것,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시게 아저씨는 평생 그 사랑을 간직했고 그 사랑의 상대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것은 결국 사쿠의 사랑도 그렇게 될 것이고 사쿠의 운명 또한 시게 아저씨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 속의 시게 아저씨는 원작 소설과 드라마판에서는 사쿠의 할아버지로 나오는데, 그들은 사쿠의 사랑을 지지하고 남은 자의 슬픔을 이해해 주며 따뜻한 위로를 해주는 역할이다. 나는 한참 동안을 이곳에 서서 아지 항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키가 사쿠에게 말했던 질문을 되새겨 보았다.
"눈을 떴을 때 줄리엣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은 기분.."
그 질문에 사쿠가 대답했다.
"시게 아저씨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잠시 후에 나는 신사를 내려와 사진관으로 향했다. 사진관으로 가기 전에 아치초에서 만든 영화 촬영지 맵에서 빠진 곳이 있어서 그곳을 먼저 확인했다. 영화에서 성인이 된 사쿠가 아키와 나눴던 교환 테이프를 들으며 그들이 함께 했던 마을 이곳저곳을 걷는데, 그때 해안 도로를 걷는 장면이 있다.
아키 -나를 잘 모르는 사쿠에게 내 소개를 해볼게. 생일은 1969년 10월 28일. 전갈자리.
사쿠 - 1969년 11월 3일 전갈자리
아키 - 좋아하는 색은, 올리브의 녹색, 숲의 초록색
사쿠 - 좋아하는 색? 파란색
아키- 좋아하는 음식 두부찜, 메이플 시럽.. 김에 간장 찍어서 쌀밥과 먹는 것.
사쿠 - 만두.. 녹차과자.. 오므라이스
아키 - 좋아하는 것.. 요리실습.. 여름의 보리차, 흰 원피스.. 미용실냄새...
사쿠 - 수영실습.. 겨울의 사슴벌레.. 우유병 뚜껑.. 방과 후 울리는 학교종
아키 - 좋아하는 영화.. 작은 사랑의 멜로디.. 로마의 휴일.. 벤허
사쿠 - 이소룡의 정무문.. 필사의 도전.. 내일을 향해 쏴라..
처음 그들이 나눈 대화들은 정말 사소한 것들이고 다소 유치한 것들이지만 이제 막 첫사랑에 빠진 사쿠와 아키에게는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대화들이었다. 그 사소한 것들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사쿠의 기억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이곳은 영화 후반부에서 한번 더 등장하는데 폭우 속을 사쿠가 뛰어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들은 아지초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도로에서 촬영된 것으로, 아지온천을 조금 지난 곳이다. 이 도로의 공식 명칭은 카가와현도 36호선으로 세토내해로 돌출되어 나온 반도를 따라 이어지고 있다.
이곳의 실제 모습은 이렇다.
영화 속에서는 버스 정류장도 있고, 버스도 보이지만 실제 이 도로에는 버스정류장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곳을 운행하는 버스편도 없다. 일본 영화사이트에서도 버스정류장은 단순히 배경에 불과하다고 한다.
앞서 아키의 생일과 사쿠의 생일이 영화 속에서 나오는데, 이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단 원작소설에서 아키는 12월 17일생으로 사쿠는 12월 24일생으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키가 1969년 10월 28일생으로 사쿠는 1969년 11월 3일생으로 나오고 드라마에서는 아키가 7월 2일생으로 사쿠는 3개월쯤 뒤에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
먼저 소설을 보면 두 사람의 생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아키의 생일은 12월 17일이잖아.."
"사쿠짱 생일은 12월 24일이고."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아키가 없었던 적은 지금까지 단 1초도 없었어."
"그렇게 되나?"
"내가 태어난 이후의 세계는 전부 아키가 있는 세계였던 거야"
그녀는 난처한 듯 눈썹을 모았다.
"나한테 있어서 아키가 없는 세계는 완전히 미지의 세상이고 그런 것이 존재할지 어떨지조차 모르겠어"
그렇게 사쿠보다 아키가 먼저 세상에 태어났고 그 뒤에 태어난 사쿠에게 있어서 아키가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아키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사쿠에게 있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과 같았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은 호주로 가려고 했지만 때맞춰 밀어닥친 태풍 때문에 떠날 수 없게 되는데 그때 공항에서 점점 의식을 잃어가던 아키가 사쿠에게 말한다.
"네 생일이 11월 3일, 내가 10월 28일이니까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내가 없었던 적은 1초도 없었어. 내가 없어지게 되어도 너의 세계는 계속 이어지겠지?"
사랑하는 사쿠와 언제까지나 함께 하고 싶었던 아키. 그리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쿠. 특히 사쿠에게 아키는 그가 존재하기 시작한 세상에서 단 한 번도 함께 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는데,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아키는 그보다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이 지상의 삶에서는 결코 앞서가는 아키를 사쿠는 따라잡지 못했다.
또 다른 촬영지들이 있었다. 우선 신사에서 바로 보이는 아지항구...
아키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가고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는 아키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슬퍼하며 방황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아지항구가 등장한다. 모든 사람들은 흥에 겨워 축제를 즐거워하는데 사쿠만이 그 행렬 속을 울며 걸어가고 있다. 오래전 사쿠가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던 그 항구의 모습....
촬영 당일 이 축제 장면을 재현하기 모두 200여 명의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었는데 실제 그들은 축제를 개최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지항구에서 아지초의 중심부로 향해 갈 때 또 다른 장면을 촬영했다. 바로 유메지마에서 쓰러져 항구로 돌아온 아키를 그녀의 아빠가 차에 싣고 병원으로 향해 가는 장면이다. 아키를 실은 차가 빠르게 항구를 벗어나는데, 사쿠는 그 차를 뒤쫓아 가다 결국 주저앉고 만다.
영화 속에서 아키의 이름을 부르며 뒤쫓던 사쿠의 절규가 들리는 듯한데 여기서 등장하는 유메지마는 어떤 의미일까? 유메지마는 아키와 사쿠가 여름방학 때 함께 여행을 간 무인도였다. 사실 이 여행은 사쿠의 친구였던 류노스케와 함께 꾸민 것으로 두 사람만이 남겨진 무인도에서 나름의 로맨스를 꿈꾸지만 실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유메지마는 사쿠와 아키, 두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가장 정점에 이른 순간이었고 그들이 머물었던 버려진 호텔에서 찾아낸 카메라는 그들이 함께 가고자 했던 울루루의 모습을 담고 있었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있었으며 꿈의 섬이라는 이름처럼 사쿠와 아키가 꿈꾸었던 사랑의 모든 것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로, 노을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곳에서 아키는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려주는데 그전까지 사쿠는 아키의 한자이름을 가을이라는 뜻의 아키 (秋)로 알고 있었으나 아키는 그것이 아니라 백악기 白亜紀의 아키라고 말해준다. 백악기는 지질시대의 구분으로 1억 45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까지의 시기를 말하는 것인데 그에 대해서 아키가 말했다.
"새로운 동식물이 많이 생겨나서 아주 번경했던 지질시대라고.. 백악기에 번성했던 공룡처럼 번성하란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야.. "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던 아키가 성장해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으며 잘 살아가란 뜻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지만 그녀는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유메지마로 나온 이 섬은 아지초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실제 이름은 이나기지마稲毛島 이다.
이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때였다. 마냥 한가롭게 머물 수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지초에서 다카마쓰로 가는 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헤치고 나는 사진관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