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공간

by 병혁

여러 모습들을 거쳐 새로운 공간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언젠가 한국을 소리소문 없이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로 바꿔 살아가는 보고 싶은 친구처럼, 나도 이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아니 어쩌면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나를 담아낼 수 있을 수 있지 싶다. 구태여 관리하고 있는 질병에 얽매일 필요도, 지인 혹은 깊게 관계 맺었던 이들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오롯이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림을 전혀 그릴 줄 모르는 나이지만, 마치 내게 새하얀 도화지 하나가 주어져 있는 것만 같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글쓰기를 지속해 온 나로서 마주한 큰 새하얀 도화지는 너무나도 새롭고 벅차게만 느껴진다.


한때는 나의 이름과 얼굴과 모든 활동이 투명하게 공개되어도 좋을 정도로 강한 윤리적 강박에 시달려, 구태여 그것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자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덕분에 혼란스러운 자아가 정돈될 수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이라면 모두 가벼움과 무거움을 지니고 있을 텐데, 나는 그것을 나의 이름을 드러내고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플랫폼을 일종의 일기장으로 생각하는 나로서는 밝은 면을 드러낼 때에 비해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로 인해 이 공간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관리하고 있는 호르몬 이슈로 인해 뜻하지 않게 그림자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것을 다루기가 퍽 어려워 고생하던 차에 글쓰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이가 있었고, 그와 깊은 사랑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모든 글은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 또한 확인하게 되었다. 그가 단순한 친구였다면 나는 계속해서 같은 공간에 글을 써내려 갔겠지만,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마친 후 나의 공간은 외면의 감시(감시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나의 '의식함'이 적당하겠지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방황하던 차에 이 공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나는 이곳에서 보다 자유롭게 나의 마음을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나를 가장 투명히 기록하고자 한다. 나의 이름을 걸고서는 절대 세상에 내비칠 수 없을 만큼, 방황하고 노력하는 나의 모습을 담아내지 않을까. 정제되지 않은 나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지 나 또한 궁금하다. 최근엔 호르몬의 이상과 이별로 인해 크게 방황하고 있고, 새로운 직장으로의 입사를 앞두고 있어 마음이 꽤나 복잡한데, 과연 나는 어디까지 고백할 수 있을 것이며, 어디까지 벌거벗을 수 있을까.


하나 다행인 점은 꽤나 많이도 망가진 채로 지난 몇 개월을 보냈는데, 요 며칠 사이에 부쩍 회복했다는 점이다. 시간의 단순한 흐름은 사람의 마음을 그리 치료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지난 한 주 동안 낯선 두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보았고, 비록 그들과 긴밀한 관계로 이어지지는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간사하게도 지나간 인연에 대한 집착이 조금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독하게도 어두웠던 지난날의 글들에 비해 조금은 가벼워진 채로, 그리고 익명의 회사원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보다 솔직하게 나를 표현하게 되지 싶다.


나는 무척이나 이 공간이 마음에 든다. 마치 가구는 어디에 배치하고, 그림은 어디에 걸 것이며, 노래는 무엇을 틀지와 같은 그런 즐거움.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이 기분이 정말 너무나도 자유롭다. 나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벗어던진 채로 이 공간에서 자유로이 산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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