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by 병혁

모조리 지워냈다. 블로그의 글들은 모두 비공개로 바꾸었고, SNS의 모든 활동 또한 나만 볼 수 있도록 바꾸어두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주 소중한 관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어서일까. 생활 면에 있어 여러모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점점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무언가 모든 기록물을 삭제하고, 익숙했던 공간으로 벗어나니 허전하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후련함을 느끼고 있다. 관성으로부터 벗어난 기분이랄까.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달리는 차 안에서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앞으로 움직여지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가 이내 멈추고 나면 그러한 움직임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곤 하는데, 마치 등 떠미는 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새로운 나를 마주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새로운 사람과 연락을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흔적을 느끼고 있지만.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그녀는 내게 스며들어 있지만, 이제는 놓아주고자 한다. 깊숙하고 따뜻했던 그러한 의미를, 그녀만이 차지했던 그러한 지위를 내려놓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또 며칠 지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진 것은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익숙했던 공간(사이버 상이라고 하더라도)을 정리하고 나니, 무겁고 어두웠던 나의 기분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나는 그 공간에서 나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인해 촉발된 나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것을 꾸역꾸역 기록하곤 했는데, 그것을 전부 치워버리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민의 깊이가 얕아진 것이다. 한때는 나의 그림자가 지구의 중심을 뚫고 그 반대편을 지나 우주를 향해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는데, 오늘의 고민은 그저 어떤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실까 하는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잠을 많이 자는 부작용과 의욕이 조금은 떨어지는 울증기에 머무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살면서 다시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 일상을 공유하지 못해 느껴지는 외로움 등은 많이도 옅어졌다. 이래서 내가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했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균형을 잡아 적당히 어질러져 있는 상황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한다. 벗어둔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지 않은 채로 그것을 바라보면 방에서 딱 눈에 띄는 수준의 깔끔함. 그것은 하룻밤 정도 내버려 둔 다음 아침에 일어나 세탁기로 넣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수준의 정돈됨이 완성된다.


기분이 그리 어둡지 않으니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듯하다. 나의 글은 어두움을 파먹고 살았던 것일까. 외려 잘 된 일이지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말끔한 정신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니, 생각보다 별로 무언가가 튀어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기분엔 굳이 앉아 글을 쓰기보다는 넷플릭스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싶달까. 아직은 새로운 도화지의 질감이 낯설 수도 있을 것이고. 뭐 그렇다.


내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할 계획이다. 내 안에 남겨진 아픈 흔적들을 모조리 날릴 수 있도록 두 팔 벌려 흠뻑 맞고 싶다. 그 바람이 거세다면 더더욱 강하게 두 팔 벌려 마주하고자 한다. 깊숙하게 자리 잡은 고통스러운 시간마저 흘려보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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