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지난 5년 간 지독하게도 케케묵은 감정들을 많이도 비워냈다. 그리고 뜯어내려고 노력했다. 현대 과학과 의학의 산물인 약물과 함께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이룩해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잘한 기억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어느 정도는 편안히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굿 플레이스"를 보며 감정은 사라졌지만 이벤트는 사라지지 않았고, 내게 일어났던 끔찍하다고 여겼던 사건은 어느새 내게 중요한 변화를 야기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언젠가 나는 누군가의 편지를 허락 없이 보고는 그의 분노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내게 무릎을 꿇을 것을 강제하지 않았고, 나는 그가 단순히 무서워서 무릎을 꿇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하게 되었다. 물론 글의 내용에는 나로부터 떠나고 싶다는 내용이 들어있었고, 그 편지는 내가 볼 수 있게끔 의도적으로 설계가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수법은 악랄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런 상황을 잘 몰랐던 나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놓으며 그를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그런 생각도 한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자존심이 세서, 그러한 충격이 가해지지 않고서는 나라는 틀을 깰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고. "굿 플레이스"를 3화 정도 보았는데, 주인공은 자신의 허물을 마주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겪고 있다. 새우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하늘에서 쓰레기가 떨어지는 등, 우스워보이지만 사실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의 소울메이트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그날은 어쩌면, 자아를 가지게 된 후 처음으로 나의 잘못을 나의 입으로 고백하고 잘못에 대한 용서를 온 마음을 다하여 바랐던 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사소하건 크건. 잘못이 잘못임을 아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고백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신부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외면의 양심이 존재하여 그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고해성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에게는 깊은 신앙도 없고, 천주교의 교리와는 잘 맞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나의 양심이 되겠다는 그의 말은 어느 정도는 성공에 이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침내 양극성 장애라는 질병을 얻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마음의 긴고아를 장착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가 두려워 어떠한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일종의 양심이란 것이 강하게 작동하는 사람이 된 것은 확실하다. 물론 나의 양심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여전히 끔찍하게도 싫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너의 영향을 받았지만, 여전히 나는 나라는 혹은 나만의 긴고아를 구축하고 싶다고. 그러나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건강 관리라는 이유로 한 동안 여유롭게 지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방기해왔다고 느끼는 것을 보면, 그의 삶은 몇몇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틀렸을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 교훈이 된 것은 확실하다.
지나치게 억눌린 생활을 지속하여 나의 뇌 어딘가에서 호르몬이 폭발하여 지금의 질병을 갖게 된 것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나도 다시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기에, 이제는 탈출구를 만들고,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안다. 그러나 지나친 자유에는 긴고아가 작동할 것이고, 나는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느낀다. 이별 후 방황하고 있는 지금,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고 있는데, "굿 플레이스"를 보다 문득 양심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그를 떠올리게 되었고, 내가 겪고 있는 지금의 총체적인 상황에서 그게 맞는 처사인지를 따지게 된 것이다.
이 망할 놈의 지나치게 정교한 긴고아. 갑자기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어 지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나의 몫임을 알고, 내 안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 오후에 잡힌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그것은 내게 즐거운 일이라고 반론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며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해야 할 일을 해내며 내 개인적인 사업도, 즐거움도, 취미도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게 되었다.
"굿 플레이스"의 소울메이트는 어쩌면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말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의 소울메이트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수도승이고, 지나칠 정도로(사실 윤리와 철학에 지나침이 있을까 싶지만) 윤리적인 사람에게는 윤리 따위는 없는 사람이 옆에 있게 되고. 3화 정도 본 지금 상황에서 혼자 상상해 본다면, 사실 "굿" 플레이스와 "배드" 플레이스는 서로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짝꿍이 있기 마련인만큼, 인간이라면 완벽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베럴" 플레이스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사실은 굿 플레이스의 목표가 아닌가 하고.
위의 문단을 쓰며, 나는 또 다른 나의 긴고아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전 애인이겠지. 여성인권의 신장에 용기를 내었던 그 사람을 나도 모르게 의식하여 단어 하나를 수정하였다. 여자라는 표현에서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나는 그와 교류하며,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보지 못해 그가 느꼈던 지점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었지만, 내가 내린 결론으로는 여자든 남자든 같은 사람으로서 불편함이 없길 간절히 바랐기에, 수다스러운 여자라는 표현이 어떠한 편견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 사람이라고 고쳐 쓴 것이다.
왜인지 모르게 갑작스럽게 눈물이 난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피곤한 사람이 되었을까. 다시금 욕지거리를 소리를 질러 내뱉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주 상스러운 욕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은, 사실은 그냥 뭣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바보같이 살 수 없게 된 것이 답답해서일까.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장 사랑한다. 그 누구보다도 러프하고 강한 동력으로 나아갈 수도, 그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나아갈 수도 있을 테니. 나는 두 명의 사람을 마음 깊이 사랑하며 내 자신을 많이도 바꾸었나 보다.
당분간은 철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적당히. 적당히. 아주 적당히 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