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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비도 꿀꺽, 조의금도 꿀꺽

17. 엄마 돈은 아빠 돈이야, 니 돈만 니 돈이야.

by 마흔아홉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엄마를 그대로 두고 동생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빠도 알았다. 그 일로 나와 동생이 싸웠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동생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질책할 생각조차 없으셨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17. 엄마 돈은 아빠 돈, 니 돈만 니 돈


엄마의 예금을 아빠한테로 이체시키고 돌아오던 날, 흥분했던 나와 달리 남편은 비교적 차분했다. 씩씩거리는 나를 두고 남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재산상속포기각서라고 있어. 인터넷에 많을 거야. 그거 네 거랑 OO이 꺼 만들어서 아버지 드려. 그러면 어머니 예금 달라는 말은 못 하겠지. "


재산상속포기에 관해 다양한 사례들과 양식이 넘쳐났다. 부채가 상속재산을 초과할 때 작성하는 것인데, 얼마 되지도 않는 예금으로 이 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 소가 웃을 일이다.


아빠에게 재산상속포기각서를 드리면서 동생 이름으로도 작성해서 드렸다. '누나는 이미 사인했으니 너도 사인하라며 누나가 두고 갔다.'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사인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남편의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셨다. 수억, 수천 예금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때 우는 아빠의 손을 남편이 맞잡았다.


"나도 죽었어야 이런 꼴 안 봤을 텐데. 안 죽고 살아서 너희 힘들게 한다. 그래도 O서방, 고맙다. 진짜 고마워. OO이가 자꾸 달라고 해서 힘들었는데, 힘이 된다. 아빠 재산 지켜주려고 해서 정말 고맙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OO이가 잘못해서 혼낸 거지 싸운 거 아니에요. 지금부터는 OO이 눈치 보지 마시고 OO이가 아버지한테 잘하는지 못하는지만 보세요. 어머니 그렇게 보내드린 건 이해 안 되고 용서도 안되지만 아버지한테만 잘한다면 저희는 그냥 덮어둘 거예요. 아버지는 그간 못 받은 효도받을 생각만 하세요."


"고맙다. 진짜 고맙다. 아들 제대로 못 키운 내 죄가 제일 크다. 하지만 진짜 고맙다."


남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빠는 눈물만 떨어드리셨다. 평생 동생이 버럭 하면 움츠러들고 기가 죽었던 아빠였다. 말 한마디 못하셨다. 부모는 나이가 들수록 아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며 동생의 뜻대로만 움직이셨다. 하라면 했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으셨다. 작은어머니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을 치곤 하셨었다.


"너네 엄마 아빠는 대체 왜 저런다니?"


그렇게 아들 말씀대로만 하시는 분이 아들네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합가는 거절하셨다. 물론 동생이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은 것도 있긴 하지만 집을 팔고 합가 하자니 거절하신 것 같다. 집은 마지막 보루와 같은 재산이었다. 가부장적 대한민국에서 한 집안의 장손, 장남으로 살아오신 아빠에게 아들은 아빠 그 자체였다.


"마누라는 이혼하면 남이고, 딸은 결혼하며 출가외인이니 남이다. 하지만 아빠와 아들은 핏줄이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 한마디에 엄마가 짐 싸들고 오신 적이 있다. 더 이상 아빠와 살고 싶지 않다고, 어떻게 40년을 함께 산 아내에게 '이혼하면 남'이라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냐며 분노하셨다. 엄마의 분노에 솔직히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에게 내가 평생 들어왔고 지금도 들어오는 소리다.


아빠가 싹싹 빌고서야 집으로 돌아가긴 하셨지만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 아빠마저도 아신 거다. 아들과 합가를 한다면 하나 남은 집마저 빼앗기고 뒷방 노인네로 구박받다 돌아가실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건 엄마가 생전에 입버릇처럼 내게 하시던 말씀이다.


"엄마 먼저 죽으면 너네 아빠 OO 이한테 집 뺏기고 길거리로 나앉을지도 몰라. 네가 아빠 잘 지켜봐."


물려받을 재산 한 푼 없는 아빠를 동생이 어떻게 대접할 것인지 엄마는 너무도 잘 알았다. 물론 길거리에 나앉지는 않으셨지만, 그 집에 관한 한 단 한 푼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셨다. 농담처럼 하셨던 말씀인데, 진짜가 되어버렸다.



재산상속포기각서를 드리고 온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늘 하던 대로 퇴근 전에 아빠한테 전화를 드렸다. 무언가를 드시다가 받으셨는지 연신 우물거리신다. 동생네가 와서 같이 식사하는 중이시라길래 '맛있게 드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려는데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7시면 주무시는 분인데 어쩐 일인가 싶어 바로 전화를 받았다.


"OO이가 재산상속포기각서 그거 법적으로 소용없다고 하드라. 그거 없어도 엄마예금 안 건드린다고 걱정 말래. 자기가 변호사, 세무사 다 알아보보고 있다고, 아빠 걱정 안 하게 해 준대."


"법적으로 효용이 없다는 것은 그거 드릴 때도 말씀드렸잖아요. 아빠 마음 편하게 해 드리자고 사인하라는 건데 그걸 안 해요? 엄마 정기예금 만기되는 거 찾으러 갈 때는 어쩌려고요?"


"예금만기일에 온대. 엄마돈 달라고 안 한다고, 자기랑 은행 같이 가재."


조의금 영수증은 가져왔냐고 하니 안 가져왔단다. 일단 엄마 돈 안 건드린다고 했으니, 아빠는 다 괜찮다고 더 따지지 말자고 하신다. 매번 이런 식이다. 바로 잡을 수 있을 때 확인하고 고쳐야 하는데, 아빠도 엄마도 항상 도망간다.


아들을 못 믿어서,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아들에게 빼앗길까 봐 어쩔 줄 몰라하시던 분이 정작 아들한테는 괜찮다고 하신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들과 소리 높이고 싶지 않으시단다. 아들이 화낼까 봐 무서우셨단다. 더 이상 말을 해서 무엇할까 싶다.


한 술 더 떠 아빠는 아들이 하자는 대로 안 해서 다음에 당신을 안 찾아주면 어떡하냐며, 찾아주는 것만으로 고마워서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엄마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한 마디라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아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신다. 나는 지금도 엄마가 동생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마지막을 동생이 지켰더라면,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로서의 역할을 마지막까지 했었다면, 아빠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처럼 존재감 없는 딸로 살다가 자연스럽게 동생과의 인연을 끝냈을 것이다. 버렸을 거다. 아니, 이미 서서히 버리는 중이기는 했다.


소시오패스's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빈번하게 거짓말을 하고 타인을 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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