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나는 예전에 울산광역시 치과의사회 회장을 역임한 적이 있다.
회장 선거에서 승리하고 당선인 신분이었던 `허니문` 기간은 전국에서 밀려드는 축전과 축하 화분들로 달달한 시간이었다.
상당수를 치과에 두고도 넘쳐나는 화분들을 주체할 수 없어 거의 대부분을 집으로 옮겨야만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도 소위 `홈 가드닝`이란 걸 시작하게 된 것이.
공기를 정화하고 전자파와 미세먼지를 잡는 등 집안에서 식물을 기르는 일은 분명 유익한 취미이다.
그리고 식물은 동물보다는 폭풍성장을 하기에 기르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사전 지식 없이 무턱대고 달려들 수 있는 만만한 일도 아니다.
더구나 마당 있는 주택도 아니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을 기르기란 더욱 어렵다.
나는 '드라코'라는 식물을 키운 지 만 2년 만에 세 번의 분갈이를 해야만 했고 키가 베란다 천정에 닿아 약간 휘어질 정도로 성장해 버렸다.
너무 커서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 데다 구부정해져 보기 싫다고 마님은 애물단지 취급을 하는데 정성 들여 키운 식물을 차마 버릴 수는 없었다.
하는 수없이 지인이 하는 큰 카페에 주었는데 천장 높은 홀 중앙에 떡하니 놓으니 마치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듯 실내 분위기와 멋지게 잘 어울렸다.
시원시원한 모습과 약간 굽은 모양이 오히려 더 멋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식물 키우는 재미를 들인 후로는 옮겨온 화분들 뿐만 아니라 단골 화원에서 종종 식물들을 데려와 햇볕이 쨍쨍한 베란다에 두고 흙이 마를세라 사흘이 멀다 하고 물을 콸콸 주었다.
식물의 생장에 햇빛이 중요하기는 하나 직광을 좋아하는 식물은 의외로 많지 않다.
또한 흙 속에 수분이 과해져서 공기층이 부족하면 혐기성 세균이 번식해 뿌리가 썩게 되고, 썩은 뿌리로는 물과 영양을 빨아들이지 못하니 마치 물이 부족한 듯 식물이 마르고 시들게 된다.
초보 가드너의 눈에는 물 부족인 것으로 보여 더욱더 물을 주고 영양제를 마구 뿌려대 결국은 과습으로 죽게 만드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넘치게 주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지나친 애정과 관심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배려와 관심은 필요하지만 맹목적으로 감싸고 특별 취급만 해선 안된다.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립할 수 있게 힘을 길러주고 차별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생각은 자폐성 발달장애를 지닌 우리 아들을 키우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폐인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가 사회성 결여이다.
자기만의 세상 속에 갇혀서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자극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애 엄마는 이것부터 극복해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하고는 놀이터에서 또래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 걸기 훈련을 시켰다.
아들은 타인의 시선도 피하는 아이인지라 당연히 울고 불고 매달리며 훈련을 거부하였고 나는 애처로워서 그만했으면 싶었지만 애 엄마는 단호했다.
한 마디라도 말을 걸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형식적인 인사라도 하고 올 때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면한 채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들은 엄마가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다가 결국 친구들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안녕'하고 던지듯 내뱉고는 쏜살같이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며칠이나 반복하더니 마침내 친구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었다.
이렇게 인사하고 말 거는 훈련이 몸에 배이자 이젠 아무한테나 스스럼없이 큰소리로 인사하고 말을 거는 게 습관이 되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어른들은 서로 어색한 시선을 달리 한 채 멀뚱히 있을 때 우리 아들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크고 똑똑하게 인사를 한다.
오히려 옆에 있던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인사가 어디 나쁜 일인가.
곧 온 동네에 인사성 밝고 예의 바른 아이로 소문이 나서 칭찬이 자자 하였다.
이렇게 사회성 문제를 극복한 아이는 어딜 가도 환영받는 붙임성을 갖게 된다.
아이가 다니던 특수 교육 기관에서는 자폐 아동들이 선생님보다는 우리 아들을 더 잘 따라서 보조 교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하였다.
자폐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단순 반복적인 일을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 점이다.
이는 잘만 이용하면 훈련이나 교육에 긍정적인 결과를 유도해 낼 수 있다.
우리 아들도 싫증 내지 않고 반복하는 특성 때문에 타고난 재능은 없어도 그 꾸준함으로 인해 특정 분야에 두각을 보이기도 했다.
그 한 예로, 기타를 좀 치는 내가 집에서 직접 가르쳐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심한 벽을 느끼고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기타 학원에 보내 봐도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그러고는 몇 년 잊고 있었는데 그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학원을 다녔던 모양이다.
어느 날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가 싶더니 친구랑 음악제에 나가 상도 타오는 게 아닌가.
사내답지 못하고 성격이 너무 유순한 것 같아 권투 도장에 보내 봤더니 폭력성을 싫어해서 무척 힘들어하면서도 끈기 있게 다닌 끝에 2단 뛰기를 백개씩 해내는 줄넘기 선수가 되었다.
수영을 시켰더니 겨울 바다에서 북극곰 수영대회에도 참가했다.
이렇듯 우리 아들은 장애인이지만 그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꾸준한 노력으로 스스로 홀로서기를 위한 성장을 해가고 있다.
부모가 그저 애처로워서 대신해 주고 보호만 하였다면 평생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지 모른다.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함께 사는 세상을 열어주는 사회적 기업들이 더 많이 생겨나야 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만의 특성을 잘 활용한다면 비장애인에 비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분야가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 아들이 다니는 회사 사장님은 우리 아이로 인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됐다고 추가로 장애인들을 더 고용하시기도 하였다.
장애인은 조금 불편할 뿐 결코 별난 사람들이 아니다.
동정과 보호의 시선보다는 조금만 배려하고 충분히 기다려준다면 다소 굽을지언정 멋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폭풍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