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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빌런

모성 때문에 악역을 맡아야만 했단다.

by 허용수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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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처음엄마는 몰랐구나.

네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기 전까진 넌 그냥 말이 늦을 뿐 수월한 아기였다고만 생각했단다.

어린이집 선생님으로부터 네가 자폐성 발달장애가 있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른 아기들과 달리 엄마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엄마가 안아주는 것도 싫어하던 너의 행동들이 그제서야 보이더구나.

그때 소개받은 분이 바로

특수아동교육기관인'아이플러스'의 K선생님이었다.

젊고 열정이 넘치셨던 K선생님을 만난 건 너에게 큰 행운이었고 그분 덕분에 나도 자폐아의 엄마로서 너와의 긴 여정을 시작할 용기도 얻단다.

선생님으로부터 자폐아특성에 관 많은 지식을 얻었고 숙제로 내어주신 너의 행동 교정에 대한 지침들을 실천해 나갔다.

너는 초인종이 울리면 반드시 너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거나 길 가다 맨홀 뚜껑이 보이면 반드시 밟고 지나가야 하는 등 사소한 것에 이상한 집착을 보였단다.

그렇게 안 해도 세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고 울부짖는  처절한 기싸움을 벌야 했다.

결국 지친 너는 차츰 집착을 포기해 나갔지.


장애인센터에 가면 자폐가 심한 아이들이 무더운 여름에도 머리에 헤드기어를 쓰고 양손에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더구나.

너도 스스로 네 손으로 머리를 때리며 자학하듯 자극을 주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두꺼운 책으로 네 머리를 더 세게 내려쳤단다.

자극이 필요했던 너를 위해 집 앞의 산을 너와 맨발로 오르며 함께 노래를 불렀던 거 기억하니?

놀이터에 가서 친구들과 말 걸기 훈련이랑 엄마랑 오랫동안 눈 마주치기 훈련 등을 할 땐 넌 너무도 힘들어하며 엄마를 무서워했지.

엄마가 껴안으면 너는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고 그럴수록 너를 더욱 힘주어 안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요즘 유튜브에 보니 자신의 자폐아이를 위해 직접 교재를 제작하고 판매도 하시는 대단한 아빠가 있더구나.

그때 이미 엄마 각종 학습지와 그림책들을 노트에 오려 붙이고 멘트를 직접 써서 눈높이에 맞는 너만의 맞춤형 교재를 만드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만든 교재가 수십 권이었고 덕분에 너는 초등학교 취학 전에 한글을 깨칠 수가 있었다.

그 교재를 후일 아이플러스에 기증했더니 엄마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다른 자폐아동들 지도해 보시라는 제안 더구나.

너에게 모두 쏟아부어 남의 아이까지 가르칠 열정이 없던지라 거절했단다.




영화 '말아톤'에는 초원이가 얼룩말 무늬 옷을 입은 여자를 만졌다가 오해를 사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아이가 장애가 있다고 사과를 하는데도 남한테 피해 주지 않게 집 밖에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여자가 항의를 하자 참다못한 초원이 엄마가 분노하게 된다.

너도 5살 때 비슷한 일이 있었어.

일반 아이들이 다니는 미술학원에 보냈는데 거기서 네가 여자아이의 다리를 만지는 '사건'이 있었다.

장애아이라고 설명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여자아이의 엄마는 성추행범으로 고발하겠다고 길길이 뛰구나.

결국 참다못한 엄마는 빌런이 되고 말았다.

어디 고발할 테면 해보라고.

상황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해명하지 않은 학원 선생님께도 다시는 이따위 학원 안 다닌다고 욕을 퍼붓고 나와버렸단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이처럼 부족하던 시절이었어.

그후로 넌 학교를 다닐 때도 여자아이들에게 맞고만 다녔지.

여자친구가 때리더라도 절대 여자는 때리지도 건드리지도 말라고 단단히 교육을 시켰거든.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플러스를 다닌 탓 너는 행동조절이 차츰 눈에 띄게 좋아져 얌전한 아이가 되어갔단다.

그래서 엄마는 너를 장애인학교가 아닌 일반 초등학교에 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상과 어울려 사는 법을 어려서부터 훈련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

입학 전 장애 등급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

자폐 2등급을 받았는데 약을 먹어야 한는구나.

그 말을 듣 엄마는 또 빌런이 되 말았어.

자폐는 장애이지 약으로 낫는 병이 아닌데 왜 약을 먹여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들어야 하냐고.


초등학교 교감선생님과 입학 상담을 할 때도 빌런이 되어야 했.

아이를 혜인학교에 안 보내고 통합교육반도 없는 우리 학교에 왜 입학시키려 하냐는 거.

우리 아이를 한 번이라도 보시고 그런 소릴 하시는 거냐고.

코앞에 학교를 두고 입학 거부를 당했다고 교육청이건 방송국이건 어디든 민원을 넣겠다고 대들었다.

그렇게 입학 허가는 받았지만 엄마는 벌써 선생님들 사이에 요주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학교 서무과에 아는 지인의 중재로 L선생님이 고맙게도 담임을 맡아주시기로 하셨다.

학년초 자모회의에서 엄마는 번쩍 손을 들 다들 꺼리는 자모회장을 자.

그리고 호소했단다.

우리 아이가 자폐가 있는데 친구들이 왕따 시키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한다.

대신 자모회장으로 반을 위해 어떤 궂은일이라도 도맡아 하겠다는 말을 하 끝내 북받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나.

다들 함께 울며 박수로 격려해 주었.

그 와중에도 엄마는 정신줄을 놓지 않고 이왕 같이 울어주신 김에 가장 먼저 눈물을 보여주신 여기 이 엄마께서 총무를 맡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렇게 졸지에 총무가 된 그 엄마는 남편이 공교롭게도 마침 아빠의 대학 후배인 치과의사였지뭐니.

우연이라도  고맙게 인연이 다니...


학교에서 공익요원 한 명을 너의 전담 수업도우미로 배정해 주었는데 그때 그 녀석이 너는 안중에도 없고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만 보며 엉뚱한 짓만 하고 있더구나.

엄마는 며칠 동안 복도에 숨어서 창문너머로 지켜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기어이 그사람을 불러 빌런 짓을 하였단다.

너 왜 딴짓을 하냐. 증거도 있는데 교육청과 병무청에 보낼까?

그랬더니 그 후론 네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열심히 도우미 역할을 잘하더라.


인지가 떨어져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던 너는 학교 성적은 당연히 형편없었지.

엄마는 손 놓고만 있을 순 없어 여러 학습지를 구독해 직접 가르치려고 애썼어.

그런데 엄마의 이러한 집착이 널 더 힘들게 하는 것 같구나.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되었지 소수점과 분수를 어떻게 이해시킬 거며, 해와 달만 알면 되지 해왕성 명왕성이 너에게 무슨 의미가 까 싶었다.

'말아톤'에서도 초원이 엄마가 마라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데 이십 년이 걸렸다고 후회한다.

5학년이 되자 너에 대한 집착을 모두 내려 놓았다.

소홀했던 누나들의 케어도 해 주어야 했기에 학년마다 맡았던 자모회장도 더 이상 맡지 않았다.

때부터 너는 기타도 치고 그림도 그리고 수영도 하며 너무 행복한 아이가 되었지.  

만일 성인이 되도록 계속 너에게 집착하고 과보호했더라면 너도 엄마도 지쳐서 정신이 황폐해졌을지 모른다.


모성 때문에 어쩔 수없이 빌런이 되어야만 했지만 엄마 자체가 너에게 빌런이 되지 않아야 했다.

지금 이렇게 우리가 지난날 얘기를 웃으면서 할 수 있으리라고는 예전엔 꿈도 꾸지 못했다.

아들아. 너는 결혼하지 말고 엄마 아빠랑 이렇게 오순도순 오래오래 살자꾸나.

사랑한다.  아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엄마의 싯점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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