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언젠가 3학년 사회 수업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장소들을 나열하고, 그 장소 중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소를 골라 다른 친구들에게 발표를 하는 활동이었다. 아이들의 소중한 장소들은 퍽 귀여웠다.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아이는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반짝거리며 질문했다.
“선생님의 가장 소중한 장소는 어디예요?”
아이의 질문 속에 들어있는 마음이 참 기특했다. 보통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소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타인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소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선생님의 가장 소중한 장소는 학교란다.”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개군초등학교. 학생수도 적은 작은 학교이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약 2년간 이 학교를 다녔었다. 11년간의 학교 생활 중 단 2년. 무척이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이 학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왜인지는 모른다.
19년이 지난 지금도 학교에 몰래 찾아가곤 한다. 바뀐 부분도, 바뀌지 않은 부분도 많다. 학교 옆에 유유하게 흐르는 한강, 그 앞에 있는 작은 집. 유치원의 위치와 놀이터는 지금도 변함없다. 최근 그린 스마트스쿨 사업으로 인해 학교 외관이 바뀌고, 새로운 건물도 많이 생겨 조금은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이 학교에 다닐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 학교는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장소이자, 내가 힘들 때 위로받는 안식처이자, 추억에 잠기는 곳이다. 우리 아버지의 첫 근무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퇴근시간까지 학교에서 남아있곤 했다. 은행을 우유갑에 넣어 전자레인지에 돌려먹기도 했고, 우유를 도서관 라디에이터 사이에 넣고 덥혀 먹었으며, 그렇게 밤이 찾아오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퇴근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차 안에서 그렇게 울어댔다.
첫 상실의 기억이다.
다시 돌아온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중간고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8살짜리 아이는 다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학교 앞에 서서 기도를 했다. ‘ 좋은 성적을 거두어 교대에 가게 해주세요. 이 학교로 돌아와 근무를 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이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공부하다 힘들면 찾아와서 마음을 다잡곤 했다. 물론 소원 또한 이루어졌다.
그리고 임용고시가 다가왔을 때도, 합격을 하고 발령지를 쓰고 나서도 학교 앞에서 소원을 빌었다.
결과적으로는 양평에 오는 것까지는 성공을 했다. 다만 개군초등학교에 가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미뤄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스토커 같은 광적인 집착일 수도 있겠지만, 학교에 가면 말할 수 없는 교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사람마다 각자 맞는 장소가 있듯, 나에게 이 학교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학교 또한 나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8살짜리 꼬마가 27살의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한강만이 유유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왜 이 장소에 다시 오고 싶은 것일까? 어렸을 때 좋은 추억은 여기 말고도 많았는데 말이다.
아직까지 그 해답을 명확하게 찾지 못했다. 운명이 이끌어 학교 앞까지 왔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해답을 알게 되겠지.
“우리들은 선생님의 가장 소중한 장소에 있는 거네요”
질문을 한 아이는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다른 학교이지만, 그럼에도 아무 상관이 없었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럼. 하지만 선생님에게는 이 장소에 있는 너희들이 더욱 소중하단다.”
사람은 언젠가 죽지만, 사람의 추억이 담긴 장소는 언제까지고 남아있다. 나에게 학교가 소중한 장소인만큼, 내가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한 풍경 하나하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장소일지라도 그곳엔 누군가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것들이 아니다. 오직 세월로만 살 수 있는 고귀한 것들이다.
그 장소를 더욱 소중하게 다루고 싶어진다.
그 추억을 나 또한 온전히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