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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우리는 수영하듯 살자

<수영하듯 살자> 6화

by 박바림


몸에 힘을 빼고 어떻게 앞으로 가요?


수영 초보에게 가장 어려웠던 관문은 체력 부족도, 발차기도 아닌 ‘힘 빼기’였다. 움직인다는 것은 근육에 힘을 준다는 것이고, 그 힘이 있어 앞으로 가는 것이련만 왜 자꾸 힘을 빼라는 건지 답답했다.


수영할 때 힘을 빼야 하는 이유는 비교적 (적어도 머리로는) 이해하기 쉽다. 수영 선수들의 몸짓은 물과 하나가 된 듯 유연하고 가벼웠다. 접영 동작만 보아도 그렇다. 뻣뻣하게 힘만 주어서는 그런 동작을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쯤은 어림짐작으로 알 테다. 그러나 막상 수영을 시작해 보면 막막하다. 힘을 주지 않고 어떻게 물속을 헤엄치라는 걸까. 물은 겁에 질린 나를 반기지 않고 뒤로 밀어내기 바빴다. 수압에 지지 않으려면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그런 초보에게 ‘힘을 빼라’는 말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힘 빼기 기술
- 수영, 검도, 복싱 -


힘 빼기, 힘 빼기.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겠을 시기였다. 수영을 배운 뒤로 지인들과 운동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때 강타를 주로 하는 종목에서도 힘을 빼라는 가르침이 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들은 운동은 검도와 복싱이었다.


H는 검도를 4년 배웠다. 검도는 목검으로 상대의 신체 혹은 물체를 타격하는 운동이다. 한때 초보의 눈으로 검도가 스트레스 해소에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있는 힘껏 검을 내려치면 얼마나 쾌감이 있을까. 그러나 H의 설명은 달랐다. 그는 검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힘을 빼는 것’이라고 말했다. 검도의 핵심은 검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닌, 탁! 하는 반동에 힘을 싣는 것이라 했다. 그 반동을 효과적으로 주기 위해서는 힘을 주고 빼는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K는 복싱을 1년 배웠다. 어느 날 그가 복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스파링에서 센 펀치는 온 힘을 실었을 때 나오는 게 아니야. 팔을 뒤에서 앞으로 이동하는 중에는 가볍게 힘을 빼고, 물체에 닿기 직전에 힘을 싣는 것이 가장 강력해. 이렇게 힘 조절을 해야 빨리 지치지도 않아.”


수영에서 힘을 빼야 하는 이유도 비슷했다. 정확히 말하면 힘 조절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운동처럼 힘을 뺄 때는 빼고, 줄 때는 줘야 한다.


강사님들은 ‘물을 밀어야 한다’와 ‘물을 타야 한다’는 관용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첫 번째 표현은 힘을 써야 할 때, 두 번째 표현은 힘을 빼야 할 때 꺼내는 표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힘이 필요한 동작도 ‘물을 차라’는 것이 아닌 ‘밀어내라(잡아라)’는 표현을 쓴다는 점이었다. 두 단어에서부터 속도와 무게의 차이가 느껴진다. 차는 쪽이 빠른 속도와 얕은 무게라면, 밀어내는 쪽은 비교적 느린 속도에 힘이 제대로 실린 무게로 다가왔다.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영법을 하면 속도감을 느낄 순 있다. 다만 금세 숨이 차고 관절이 손상된다. 수영에서 물을 밀고 타는 것은 점성이 있는 물을 이기려 애쓰지 않고, 힘 조절의 리듬을 만들고, 호흡이 가빠지는 속도를 늦춰 부드럽게 헤엄치기 위한 지혜였다.



힘을 빼지 못한 이유

머리로는 이해하기 쉬운 논리이지만 몸에 완전히 익히기까지는 9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돌이켜보았을 때 이유는 두 가지로 예상한다. 첫째는 물이 여전히 무서워서 경직된 습관이 남아있던 탓이고, 둘째는 내 성격이겠다.


현대인답게 일상을 굉장히 피곤하게 살았다. 밤낮을 꼴딱 새서 과제를 제출했고, 야근을 자주 했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는 꼴을 못 봐 개인 공부나 집안일로 할 일을 가득 메꾸어야 직성이 풀렸다. ‘최선’, ‘더 나은 삶’. 그건 온 힘을 준 자만 누릴 수 있는 단어라 여겼다.


헐렁함과 엉성함은 견디기 어려웠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온 육지의 세상은 그랬다. 부족한 상태를 인내심 있게 여유로운 태도로 관망하는 것은 어쩐지 미련해 보인다. 적어도 빠른 성과를 요구하는 능력주의 시대에는 불리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상처 입힌다. 이 흉터를 ‘완벽주의’라 부르며 훈장을 쥐어준다. 고생하는 삶에 한탄하면서도 그 훈장을 놓을 순 없다. 그건 어떤 정체(停滯)된 상태, 주저앉은 삶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인정과 행복, 사랑받는 삶과 멀어지고 만다.


습관은 수영을 할 때에도 이어졌다. 영법이 정확하진 않더라도 ‘그럴싸하게’ 익히고 싶었다. 천천히 가라는 강사님의 조언을 흘리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빨리, 빨리! 어깨와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힘주는 방법밖에 몰랐던 당신에게


언제부터 힘을 풀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 물속에서 흉부의 답답함이 서서히 무뎌진 것처럼, 그저 오래 반복하다 보니 요령을 익힌 게 아닐까 짐작한다. 채 썰듯이 빠른 속도가 아닌, 밀가루 반죽처럼 조금 늘어지게 다루면서 말이다.


“힘을 빼야만 더 쉽게 나아갈 수 있어요.”


온몸에 힘을 주고 사는 법이 익숙해진 우리에게, 수영은 생경하면서도 아늑한 메시지를 준다. 승모가 부풀만큼 고개를 숙이고 어깨가 잔뜩 솟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되려 필요 이상의 힘을 실으면 가라앉는다. 팔이 감싼 물길이 내 몸을 둥실 태운다. 흘러가게 도와준다. 빠르게 이기려 애쓰지 말고, 내 몸과 물이 함께 만든 리듬을 헤엄치면 된다.


그러니 우리는 수영하듯 살자.

이것은 정체(停滯)이자 주저앉은 상태가 아닌, 앞을 향하는 또 다른 태도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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