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하듯 살자> 22화
“회식은 잘 다녀왔어?”
중급반 회식을 마친 날이었다. 수영을 같이 시작한 친구 L, 리율이 톡 메시지를 보냈다. 추가근무로 아침잠이 많아진 그는 요즘 수영장에 나오지 못했고 회식도 불참이었다. 아쉬운 대로 우리는 메시지 안부를 주고받았다. 회식이 재밌었는지 물었다. 나는 답했다. 응, 새로운 수영친구들을 사귀고 왔지. 리율은 수영친구는 나뿐이었는데, 라며 장난 섞인 문장을 남겼다.
수영친구 리율. 그와 나 사이에는 더 많은 별칭이 있다. 친구란 어디에서 인연이 시작되었는지에 따라 다양한 호가 붙는다. 그와 처음 만든 호는 ‘대학친구’였다. 정확한 첫 만남은 흐릿하다. 그를 마주친 장면들을 머릿속에 모아보았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멍한 표정을 자주 지었다.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가 분명해서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각자 다른 친구를 사귀어 앞으로도 말 붙일 리 없을 운명이려니 했다.
의외로 기회는 찾아왔다. 대학교 3학년이 되자 동기들 중 절반 이상이 휴학을 했다. 함께 새 학기를 맞이한 이는 10명 남짓했다. 그중에 리율이 있었다. 2학년까지 얼굴도 마주치기 어려웠던 그와 겹치는 수업이 많아졌다. 빈 시간이 길었던 만큼 통상적인 대화소재를 끌어모아야 했다. 첫 질문은 왜 휴학을 하지 않았는지였다.
“그냥 뭐, 휴학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빨리 졸업하고 돈 벌고 싶으니까…”
그냥. 그의 대답에서 빠지는 법이 없는 단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나로서는 생경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 별다른 이유 없이. 무척이나 헐렁한 대답이었다. 때문에 그를 의욕 없는 사람으로 오해했었다. 그러나 같이 지내는 시간이 쌓이며 알았다. ‘그냥’은 ‘대충’ 같은 게으름의 표현이 아니었다.
카페에서 과제를 했을 때였다. 그날따라 너무 하기 싫었다.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이유를 뒤적이며 집중하지 못했다. 몸통을 책상에 집어넣을 사람처럼 흐느적거렸다. 옆을 보았다. 리율은 몇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집중력의 빈부격차를 느꼈다. 비결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넌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
“음… 들어. 집 가고 싶어.”
“그런데 왜 하기 싫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해? 난 계속 몸부림치면서 딴짓 중인데.”
“그냥 뭐… 하기 싫어도 어쩌겠어. 어차피 해야 되는 건데.”
나는 그 뒤로 리율 옆을 졸졸 따라다녔다. 졸업 작품도, 수업 과제도 항상 같은 카페에 모여서 했다. 상념이 머릿속에 줄줄 찰 때마다 그의 가벼운 체념과 날렵한 추진력이 해독제가 되었다. 생각을 덜어내는 법을 처음 배운 건 수영이 아니라 어쩌면 리율에게서였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졸업했고, “대학 친구”라는 별칭을 고이 간직하게 되었다.
졸업 직후 이사를 가야 했다. 오랜 룸메이트이자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친언니를 따라서. 대학교 근처에 남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리율과 떨어지는 게 마음에 걸렸다. 당연하게 만나던 이와 한 순간에 멀어진다는 건 매번 쉽지 않은 일이다.
이사 온 동네 카페에 갔다. 포트폴리오 작업 화면을 열었다. 마음 한 구석에선 하기 싫은 마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마다 리율을 떠올렸다. ‘하기 싫어도 해야지 뭐 어떡해.’ 미지근하지만 담담한 마음가짐 덕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회고만으로는 허전함을 메울 수 없었다. 리율과 함께였을 적에는 할 일을 끝내고 저녁을 먹었다. 산책을 했다. 혹은 더 멀리 나가 인근 아파트 놀이터에서 기구를 탔다.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할 일을 끝낼 동력이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졸업한 지 8개월이 지났다. 어느 때보다 조용한 가을을 보내던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나 이사가게 됐어, 네가 살고 있는 곳 옆 역으로!”
일부러 가까운 지역을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그제야 삼켜두었던 마음을 토로했다. 혼자 있느라 허전했어. 징징거릴 곳도 없어 외로웠어.
우리는 다시 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리율은 재택근무를 하던 중이었고, 나는 교수님 연구 프로젝트와 포트폴리오를 작업했다. 저녁에는 음악을 틀어놓고 침대에 잠깐 눕거나 치킨을 먹었다. 밤이 깊어지면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그다음 날에도 만날 게 분명했다. 그때부터 우리 사이에 ‘동네 친구’라는 호가 추가되었다.
소중히 아껴고 싶은 건 늘 금세 빼앗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율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그는 다시 사무실 출근을 하게 되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상황이 좋지 않았다. 생계수단이었던 연구 프로젝트도 끝났고, 백수가 된 지 1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첫 화에 등장한 시기에 도래했다.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고 좁은 방 안에만 갇혀 지냈다.
바깥에서 하는 운동을 해야겠다. 그때 지도앱을 열어 수영장을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사설 스포츠 센터가 있었다. 그다음엔 함께 할 사람을 모집해야 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대학친구이자 동네친구인 리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리율은 10분도 안 되어 바로 좋다고 답했다. 이번에도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첫 수업을 끝내고 우리는 한껏 들떴다. 공기가 차가워! 그런데 개운해! 하늘 봐, 엄청 파래! 우리 회원증 인증사진을 찍자, 저기 무인사진관에서 첫 수영 날 기념사진을 찍자. 배가 너무 고픈데? 분식집에서 밥이라도 먹자. 우리는 평소에 먹지도 않던 아침을 깨끗이 비우고 헤어졌다. 리율은 출근을 했고, 나는 취업 학원 OT를 들으러 갔다. 수영가방과 책가방을 함께이고 지하철에 올랐다. 짧은 시간에 못다 한 감상을 메시지로 늘어놓았다. ‘너무 재밌다. 우리 주말에도 자유 수영에 갈까?’ ‘너무 좋지.’ 수영친구라는 새로운 호를 만들었다.
가끔 이런 질문을 꺼내본다. 친구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이 질문은 좋을 때보다 나쁠 때 꺼내는 경우가 잦다. 기대감보다는 회의감이 더 클 때, 내가 애쓰는 것보다 돌아오는 만족감이 적을 때 그렇다. 꽤 다양한 사람을 만나왔지만 여전히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엔 쉽게 답하지 못한다.
관계의 유형 중 어떤 경우가 더 나은지 간을 재보는 문항들이 있다. 흔히 ‘밸런스 게임’이라 불린다. 행복할 때 축하해 주는 친구와 불행할 때 위로해 주는 친구 중 누가 더 귀인에 가까운가. 여기에 대한 정답도 모르겠다. 사실 한쪽에 딱 걸맞은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다. 힘든 시기를 같이 한 친구, 즐거운 순간을 같이한 친구,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 믿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한 사람마다 친구라는 단어 앞에 붙는 수사어가 시시각각 바뀌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한결같지 못한 탓인 듯하다.
그렇다면 리율은 둘 중 어디일까. 그의 헐렁한 체념과 이성적인 추진력이 귀감이 될 때도 있었지만 말랑하지만은 않은 위로가 서운할 때도 있었다. 이분법을 넘어 다른 별칭을 정해주고 싶었다. 가끔은 엉뚱한 말로 웃음을 주는 친구, 별난 제안에도 망설임 없이 동조해 주는 친구, 이상하다고 딴지를 걸지 않고 묵묵히 응원하는 친구, 해가 지날수록 별칭이 늘어가며 별난 사이가 되고 있는 친구.
우리는 조만간 또 새로운 호를 만들 것 같다. 그게 무엇이 될진 모르겠지만 분명 그럴 요량이었다. 나와 그는 늘 이런 말을 자주 꺼냈다.
“우리 다음엔 뭐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