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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웃음 삼촌

<수영하듯 살자> 23화

by 박바림
여행을 다녀오느라 연재 일정이 많이 미뤄졌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글임에도 항상 방문해 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


친구 따라 강남을 갔다. 아니, 상급을 갔다.


월(月)이 쌓여 년(年)이 될 때쯤 많은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레일을 떠났다. 나는 그들의 빈자리를 메꾸며 점차 앞쪽을 자리했다. 오래 머문 이들과 새로운 이들이 뒤섞여 한 수업에 스물여덟 명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게 얼마나 많은 숫자 인가 하면, 줄이 길어서 한 바퀴를 돌아도 편도 25m 만 도는 꼴이나 다름없으며, 접영을 할 때는 레일 절반을 잠영해야 했다.


어느 날 각 반 강사님들이 한쪽 구석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다시 돌아오더니 상급으로 올라갈 사람을 지목했다. 앞쪽에 선 사람들, 회식에서부터 친해진 파란 수모 은광님과 한 언니를 가리켰다. 번번이 줄이 밀리는 게 불편했던 그들은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싫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우면 내가 선두가 될 운명이었다. 바퀴 수를 세는 일이 번거롭고, 속도가 빨라야 한다는 강박도 부담스러웠다. 수영을 하며 누군가의 뒤에 서는 안락한 맛을 알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친구 따라 상급반으로 갔다.


상급은 세 개의 레일로 나뉘어 있었다. 벽 쪽부터 순서대로 상하, 상중, 상상반이라 칭했다.

새로운 반인 상하반에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신체에 드러난 세월과 경험의 터울이 까마득해 선뜻 대화를 건네기 어려웠다. 속도는 조금 느렸고 허리가 아픈지 특정 영법을 넘기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상급반답게 고수였다. 매월 철인 3종 경기 동호회에 참여하는 백발 할아버지와 모든 영법 자세가 멀끔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빙구웃음 삼촌이었다.


순수와 광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그는 수업 중간에 몇 바퀴씩을 꼭 건너뛰었다. 벽 구석에서 팔 하나를 바깥에 걸쳐두고는 락커룸 팔찌가 끼워진 페트병 물을 마셨다. 왜 저런 근육진 체구를 지니고도 자주 쉬는 걸까. 의문은 소문을 듣고 말끔히 달아났다. 그는 새벽 4시에 헬스를 하고 새벽 6시 수영을 오는 것이었다. 내가 상급에 머물러도 되는 건지 고민이 많아졌다.


그가 어느 날 말을 걸었다.


“어우, 수영 잘하시네요. 쪼끄매서 힘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은근 세요.”


칭찬이지만 어색했다. 수영을 잘한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던 탓에 빈말이라 여겼다. 인사치레 한 번 하고 무를 그런 것. 그러나 그는 일주일 내내 비슷한 말을 했다.


“어린 친구라 그런지 금방 배운다니까, 자유형 속도도 빠르던데요? 접영 모양새도 좋아.”


혹시 고도의 놀림은 아닐까? 기쁘기보다는 의심됐다. 못하면서 잘하는 줄 알고, 앞쪽에 서는 게 아니꼬왔던 건 아닐까. 오해받는 건 질색이었다. 그래서 먼저 앞으로 가라고 말씀드려도 봤다. 그러나 연신 손사래를 쳤다.




칭찬을 받은 뒤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그의 말만 유별나게 뜯어보는 건 아니었다. 말의 껍질을 모두 벗겨 달디 단 부분은 모두 버렸다. 쌉쌀한 씨앗만 남겼다.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네. 그렇다면 다음엔 더 잘해야겠네.’ 칭찬을 들으면 되려 가슴이 졸여오고 비장해졌다. 건넨 이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거만하게도 되려 상대의 자격을 따지기도 했다.


칭찬을 얼마나 곱게 생각하는지 여부를 떠나 꼭 지켜야 할 나만의 법칙이 있었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 한다. 문득 수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떠올랐다. 의도가 어찌 됐든, 나는 그에게 고운 말을 되돌려준 적이 있던가? 되짚어보니 ‘아녜요’ 고개를 젓기 바빴다. 조금 무안했다. 받아먹기만 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다음날 그를 만났을 땐 어떤 칭찬이라도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접영을 할 시간이었다. 그는 어김없이 내게 앞으로 가라는 듯 손짓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앞으로 가세요, 접영도 잘하시면서”


그러자 그는 있는 힘껏 입꼬리를 올려 헤실거렸다.

“아하하. 에이, 그 정도는 아닌데.”


곧바로 수경을 고쳐 쓰더니 평소보다 힘차게 물을 가로질렀다. 얼마나 세차던지, 지금까지 본 접영 중 가장 힘 있는 웨이브였다. 그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게 앞으로 가라고 권유하지 않았다. 쉬지도 않았다. 용기 내어 건넨 칭찬이 아깝지 않을 만큼 몇 번이고 기세 있는 접영을 보여주었다. 나까지 덩달아 웃음이 났다.


샤워를 마치고 출구를 찾던 참이었다. 지름길인 뒷문이 열렸는지 살펴보았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열렸어요.”


그였다. 수모를 벗은 모습은 처음이라 알아보는데 몇 초가 걸렸다. 반가움에 어!라는 추임새가 튀어나왔다. 그는 얼굴 주변에 ‘우헤헤’라는 글자가 보일듯한 미소를 띠었다. 역시나 물속에서 만난 자의 이름은 모르는 법이고, 자연스레 별칭을 지었다. 빙구웃음 삼촌.


삼촌과 뒷문 계단을 함께 올랐다. 짧은 시간 동안 스타트 자세와 영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건강 안부도 주고받았다. 그는 요즘 목에 담이 걸린 듯 뻣뻣해져 수영이 어렵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칭찬 한마디에 장렬한 접영을 보였다.


마지막 계단을 디뎠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말을 건넸다.

“운동을 정말 좋아하고 잘하시는 것 같아요.”


그는 또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말했다.

“아하하. 감사해요!”


뿌듯함이라는 감정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순간 다른 별칭이 떠올랐다. 단순 무식한 고수. 단순무식. 칭찬을 비틀어 듣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순수하고, 기쁨을 무르지 않고, 식지 않은 웃음을 흘리는 고수.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런 별칭을 붙여주고 싶었다. 삼촌의 빙구웃음을 되새길 때면 나도 피식 웃음이 새었다



반을 옮기며 ‘올라갔다’는 표현을 써도 될지 고민했다. 실력향상을 수직선이 아닌 다르게 표현할 방법은 없는 걸까. 끝내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인생을 평평하고 고른 땅으로 바라보려 해도 쉽지 않다. 이미 경쟁에 푹 절여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지, 혹은 불편하지만 진리이기 때문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우리의 삶이 어딘가를 향해 올라가는 거라면 꼭 간직해야 할 건 무엇일까. 아직 가닿아 본 적 없는 세상, 누군가를 짓눌러야만 도달할 수 있다 여겼던 세상을 다시 한번 더듬었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어깨가 솟는 비장함 대신 빙구웃음 삼촌의 얼굴을 떠올렸다.


피식.

얼굴에 압력이 풀렸다. 어쩐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게 덜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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