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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0 한강에 가자

<수영하듯 살자> 24화

by 박바림


한강에나 가자.

- 물이 아직 차가울 걸, 겨울이라.


가볍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종종 또래가 모이면 이런 말을 실없이 낄낄거렸다. 농담도 정도가 있지,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 그들의 가벼움에 선을 긋고 싶다가도 이해가 되어버렸다. 실패를 너무 많이 맛봐서 어떤 말이 쓰고 단지 구분이 안 가기에 그러겠거니 했다.



목표를 잃은 적이 있다. 하나도 남김없이. 플래너를 빼곡히 채우는 습관을 지녔음에도 말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아져 표본이 되었을 쯤에야 이 감정이 한 단어로 묶였다. 무기력하구나. 원하는 것도,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구나. 뉴스에서는 그런 이가 몇 십만 명은 된다고 보도했다. 탈락, 탈락, 탈락.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내 실패 사유는 노력 부족이었다.


조금 무리했다. 건강이 나빠지고 무뎌지길 반복했다. 생각이 점차 비워지더니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아무 생각 없어진 김에 아무 이유 없이 생각났다. 아마 생각이 있었으면 평생 하지 않았을 거다. 수영은 시간 낭비였다. 왕복 이동시간, 씻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 지쳐서 잠깐 쉬는 시간까지 합하면 세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더군다나 커리어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성공이 3시간 뒤로 밀린다. 한 달이면 약 45시간이 밀린다. 그러니 작더라도 명분, 동기(動機)가 필요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새로운 운동을 해보자.
친구랑 같이.


아래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목표인지 실감할 수 있다.


포트폴리오를 제작해서, 큰 기업에 취업해서, 주변이들의 인정을 받고, 나중에는 큰 지면에 실릴만한 인물이 되어야지.


이에 비하면 엉성한 명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비록 얕을지라도, 작은 움직임이 얼마나 긴 파동을 만들 수 있는지 말이다.

첫 목표를 달성했다. 수업을 수강하며 꾸준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다음 목표가 생겼다. 흉부가 답답해지지 않을 만큼 물에 오래 있어보자. 다음에는 호흡을 길게, 킥판 없이 자유형을, 배영을, 평영을, 사람들과 인사를, 대화를, 못해도 괜찮으니 접영을. 하나를 이루면 곧바로 살을 붙여 다음 계획을 세웠다. 그것을 이전처럼 거대하고 희끗한 먼 미래의 것으로 두지 않았다. 작고 선명한 것부터 붙잡아 함께 나아갔다. 성취가 불어났다.

그러자 주변에서 흥미로운 샛길도 알려주었다. 나중에 바다에 놀러 가도 재밌겠어요. 이제 수영을 잘할 테니까요. 스쿠버나 프리다이빙을 도전해 보면 어때요, 깊은 물 속도 정말 재밌거든요.


그중 당장 눈에 띄는 제안은 이거였다.


“같이 한강 건너볼래요?”


한 회원분이 말했다. 알고 보니 수영에서는 꽤 유명한 연례행사였다. 거리는 2000m. 오리발을 착용하긴 하지만 발이 닿지 않는 강이랬다. 하지만 시멘트 천장 없는 하늘 아래에서 수영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유혹했다. 미래의 유익함을 따지던 사고로는 설득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꺼이 속고 싶었다. 이유는 리율의 말투를 빌렸다. 그냥. 재밌을 것 같으니까.


목표가 갱신되었다. 체력 증진이 필요했다. 수업시간에 쉬지 않고 수영한 덕분에 맨 발 1,000m는 거뜬해졌다. 주말 자유수영 시간에는 40바퀴 이상 돌았다. 가슴 한 구석이 들떴다. 캘린더 앱에 디데이를 설정했다. 바쁜 일상을 지내다 보면 달력 숫자가 점점 내려갔다.


D-30.


일단 밖으로 나가자.

보잘것없던 동기(動機)가 진화를 거듭해 새로운 곳에 다다르고 있었다.


한강에나 가자. 직접 건너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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