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먹는 꽃
그 여름, 뒤늦은 햇볕이 벽을 긁고 있었다.
오후 7시를 넘긴 시간, 나는 익숙한 듯 아닌 듯한
동네 골목을 걷고 있었다.
목덜미에 붙은 셔츠의 목깃은 땀에 절어 있었고,
주머니 속 핸드폰은 몇 시간째 울리지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더웠다.
말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은 날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열기 속에 오래 서 있고 싶었다.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나는 무언가를 지우고 싶어 정처 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로 씻어지지 않는 기억, 말로 풀어지지 않는 문장, 마음 어딘가에 오래된 종양 같은 것.
생각 없이 골목을 10분쯤 걸어왔을까..
어렸을 적 다니던 분식집과 문방구 간판을 보니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장소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더욱 깊게 들어갈수록 그날따라 이상하게
달라 보였다.
동네 지도에조차 나오지 않는 처음 보는 오래된 책방, 그리고 그 옆으로 이어진, 누구의 뒷마당도 아닌 공간.
그곳은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정원이었고,
누군가에게 잊힌 장소임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추레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멍 때리며 지켜보던 나는 어느새
녹슨 철제문 안으로 들어가 있었고
발끝에는 한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부서진 낙엽 잎사귀들이 걸리적거렸다.
그렇게 허리를 숙여 묻은 낙엽들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난 오래된 정원 돌바닥을 뚫고 자란 한송이 꽃과 마주쳤다.
그 꽃은 처음부터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말도, 향기도 없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냥 꽃이 아니라는 걸.
바닷속 투명한 해파리 같은 꽃잎들이 노을의 그늘이 닿음과 동시에 오묘한 보랏빛으로 변했다.
그 꽃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 마음 어딘가에 있는 걸 꿰뚫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서서히 두려움을 묻어두고 호기심을 꺼내어 서서히 다가갔다.
그순간, 멀리서 들려오던 매미소리를 비롯한 주변의 소리가 순간 멈춘 듯했다.
곧이어 흩날리던 낙엽들도 서서히 멈추더니 한겨울 첫눈 처럼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