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먹는 꽃
“혹시… 그 꽃, 내가 전에 만진 적도 있습니까?”
돌보는 자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게 이 꽃의
방식이니까.”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이곳에 남는 것일 뿐.”
돌보는 자는 꽃을 등진 채 말했다.
그의 말은 이미 수없이 반복된 냉정한 경고문처럼
들렸지만, 그 안엔 쓸쓸한 온기가 있었다.
“이 꽃은 단 하나의 기억을 가져갑니다.
당신이 정한 게 아닌, 이 꽃이 선택한 하나.”
나는 숨을 작게 들이마셨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처음 들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는 비지 않습니다. 그 빈 곳엔… 이 꽃이 자랍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은 알 수 없지만, 그 자리는 변형됩니다.
잊은 채로 그 기억을 대체할 ‘무언가’를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내죠. 왜냐면 인간은 기억 없는 감정을 견딜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시선을 꽃에 고정했다.
꽃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만큼 불길했다.
“그럼 이 꽃도 누군가의 기억을 가져가서 핀 꽃이니깐 제가 처음이 아니군요? “
.
.
.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죄책감’을 지우려 했고,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를 편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못했죠.”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묘한 무게가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아픈 사랑을 지웠습니다. 그는 편안해졌고, 눈물도 멈췄죠.
하지만… 그 후로 어떤 얼굴을 봐도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작동하지 않았어요. 기억뿐만이 아니라 감정까지굳어버린 겁니다.”
나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 말이 목구멍에서 멈췄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고 그의 그림자가 내 앞에 드리워졌다.
그러자 다시 투명했던 꽃이 보랏빛으로 변하는 걸
가리키며 말했다.
“그 감당은, 오롯이 당신 몫입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그의 손목 아래에 희미하게 남은 흉터를 보았다.
매우 얇고도 여러 겹의 오래된 자국.
마치 무언가를 잃은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워준 사람이 가진 흔적 같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꽃을 찾습니다.”
그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두 번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