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불꽃, 그리고 기억 속 사건
샤갈의 그림을 응시하는 순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강렬한 붉은색이었다. 어둡고 침울한 파란색 에펠탑 옆에 가녀리게 서 있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진홍색 나뭇잎들, 신부의 순백색 롱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정갈한 정장 차림의 우아한 신사,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안겨 있는 부모와는 달리 포동포동한 사내아이가 그려진 사진 위로 펼쳐진 핏빛 같은 붉은 천 조각. 게다가 천장에 매달린 아이들 모빌 같기도, 자동차 바퀴 같기도 한 알록달록한 둥근 장식 한가운데의 새빨간 색채는 내 눈에 타오르는 불길처럼 느껴졌다.
이 그림을 마주한 순간, 지난주에 겪었던 웃지 못할, 아니 어이없는 사건이 떠올랐다. 병아리콩을 인덕션 위에 올려놓고 잠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불려둔 콩이라 빨리 조리를 하려고 가장 높은 온도인 9단에 놓고 침대에 편안히 누워 유투브도 보고 책도 읽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고, 나는 인덕션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는 사실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를 즐기며 여유를 만끽하는데, 어디선가 귀를 찢는 듯한 '삐이익 삐이익~'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지 못하고, '도대체 어디서 이런 소음이 나는 거지?' 하며 은근히 짜증이 밀려왔다. 소중한 나만의 시간을 누군가 방해하는 듯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그 '삐~익~삐삐삐~'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려오자, 의아함을 느끼며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 소음은 바로 내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실은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부엌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짙은 안개처럼 뿌옇게 뒤덮여 있었다. 그 통로 위 화재경보기에서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부엌에 병아리콩을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가니 병아리콩과 냄비는 까맣게 타버려 있었고, 인덕션은 마치 화산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빨리 인덕션을 끄고 냄비를 싱크대에 넣어 물을 틀었다. 순간 거대한 검은 연기가 냄비에서 솟구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코와 입을 가리고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거실, 방, 화장실, 부엌 등 문이라고 보이는 모든 곳을 열었지만, 요란한 화재경보기 소리는 꺼질 줄 몰랐다. 몇 분 동안 그 소음을 듣고 있으니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문득 전기 셔터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스쳤고, 집안의 두꺼비집, 즉 누전 차단기를 내려 모든 전기를 차단했다.
그러자 잠시 후, 화재 경보기 소리가 점차 힘을 잃어가더니 '삐삐익~' 소리가 약해지다 마침내 사라졌다. 모든 창문이 열려 연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경보기도 완전히 침묵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연기 속에서 이 황당한 상황을 만든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다행히 한국인이었는데, 4층에 거주하는 그는 연기가 자신의 집까지 가득 차고 화재 경보기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내려왔다고 했다. 2층인 우리 집에서 피어오른 자욱한 연기가 창문을 타고 위층까지 올라간 것이었다. 또한 창문을 열자 요란한 경보기 소리에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창문을 열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화재가 발생했다고 생각해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기가 나오는 집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4층 남자는 불이 난 줄 알고 염려되어 직접 우리 집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오가는 계단통로까지 연기로 자욱했다. 음식물이 탈 때 발생하는 '조리 연기'가 우리 집뿐만 아니라 아파트 복도와 3층, 4층까지 자욱하게 퍼져있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잠깐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진심 어린 사과를 여러 번 전했다. 다행히 아파트 내부와 같은 층에는 모두 외출 중이어서 아무도 없었다. 4층 위에 몇 명만 있었을 뿐, 대부분은 집을 비운 상태였다.
4층 남자에게 집안을 보여주며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었음을 설명하고 이제는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전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어디선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또 무슨 일이지?' 싶었는데, 소방차와 소방관이 출동한다는 것이었다.
"네? 소방차가 온다고요? 아니, 왜요?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소방차가 와요?"
"불이 날 수도 있죠. 여기 아파트는 거의 다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순식간에 불이 나면 다 타버리니까 바로 소방관을 불러야지요." 4층 남자의 설명이었다.
"그럼 누가 불렀나요?"
"제가 불렀죠. 불이 나면 큰일이니까요."
"아, 그래서 소방차를 불렀군요. 불이 안 나도 소방차가 와요?"
"그럼요. 여기는 불이 나든 안 나든 신고하면 바로 출동해요."
"그럼 소방관과 그 거대한 소방차가 여기 왔단 말이군요."
"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소방관 복장을 한 프랑스인 두 명이 우리 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한 명은 밖에 대기하고, 다른 한 명은 나에게 '봉주르'라고 인사하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마담, 혼자 계신가요? 연기 난 곳이 어디죠?"
나는 그를 부엌으로 안내했고, 그는 부엌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싱크대와 인덕션 바로 밑부분, 연기가 자욱한 거실과 복도 등 집안 구석구석을 점검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불어가 유창한 4층 한국인 남자가 상황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나는 불어를 이해하는 수준에서 답변했고, 전기 누전 차단기를 내렸다는 것과 화재 경보기가 지금은 멈추었다는 것, 그리고 까맣게 탄 냄비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소방관은 내 얼굴을 살피고 집안을 둘러본 후 1층에 대기 중인 다른 소방관에게 불어로 무언가를 전했다. '전기 누전 차단기를 내렸다'는 말에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했다. 집안을 점검한 후 조심스럽게 차단기를 다시 올렸다. 전기가 문제없이 다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사실 소방관이 왔다는 것보다 그 거대한 소방차가 출동했다는 사실에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파리의 소방차는 대형 차량이다. 소방차가 진입하면 다른 자동차들은 진출입이 불가능해서 소방차가 떠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몇 주 전에 내가 그런 상황을 목격했기에, 소방차 출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편을 끼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소방관은 내게 괜찮은지, 다치지는 않았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등 여러 번 확인한 후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나는 감사하다며, 정말로,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다시 한번 그들에게 사과했다.
소방관과 소방차가 떠난 후 4층 남자는 "아무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네요"라며, 이 아파트는 나무로 된 오래된 주택이라 사람들이 화재나 연기에 매우 민감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내가 혹시 소방차나 소방관 출동에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그렇다면 누가 부담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집주인에게 보고되는지 물었다.
다행히 파리에서는 소방차나 소방관이 신고를 받고 출동해도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장난 전화가 아니고 오늘처럼 실제로 연기가 발생한 상황이라면 소방관은 당연히 출동합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자욱한 연기와 시끄러운 화재 경보기로 불편을 끼쳐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며, 여러모로 도와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도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네요"라며 4층으로 올라갔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현관문을 닫은 뒤, 연기가 자욱한 집안에서 활짝 연 창문 때문에 오돌오돌 떨면서 오랫동안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해외생활 17년 만에 이런 일을 겪다니. 여러 번 냄비를 태우고 집안에 연기가 자욱할 정도로 음식을 까맣게 태운 적이 있었지만, 그저 시간이 지나면서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복귀했었는데. 하필 여기서, 그것도 파리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어이없기도 하였지만, 타는 냄새와 연기로 속이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이 상황을 곱씹으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4층 남자의 말처럼, 이 정도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진짜 불이라도 났다면, 얼마나 큰 민폐였을까!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지만 차마 얼굴을 밖으로 내밀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혹시 누가 볼까 창문이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소방차가 빨리 떠나기를, 사람들이 나로 인해 불편함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요즘 점점 기억력이 쇠퇴해가는 것 같다. 대화할 때 단어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가끔씩 이런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서글퍼진다. 오늘처럼 화재 직전의 상황을 마주하니 기억력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커졌다.
이번 일로 나는 훨씬 더 조심하게 되었다. 특히 인덕션 사용 시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가능하면 불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급한 일을 처리하지 않으려 하며, 조리 중에는 침대에서 쉬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연기가 자욱하고 집안에 깊이 밴 쾌쾌한 냄새 때문에 지금도 고생하지만, 이 냄새로 인해 기억력과 '화재 주의'라는 인식을 강하게 뇌리에 새길 수 있어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일로 아파트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항의하거나 불평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복도에 담배처럼 불쾌한 냄새가 감돌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기억력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기억력 개선과 유지를 위한 다양한 방법 중에서 독서, 새 언어 학습, 악기 연주가 효과적이라고 한다. 지금 내가 실천하고 있는 것들이다. Delf B2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매일 불어를 공부하고, 피아노를 배우며, 하루 30분씩 독서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활동들을 의무감으로 수행했지만, 이제는 더 즐겁고 기쁘게 행하려고 다짐한다. 나의 소중한 기억력을 위해서.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이런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