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下
다음 날.
비는 더 거세게 쏟아졌다.
이재우는 전날보다 더 일찍 나와 그 자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
어제와 똑같은 자세.
어제와 똑같은 하늘.
그녀가 남자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재우의 심장을 조여왔다.
불안이 서서히 목덜미를 타고 오르더니, 이내 설명할 수 없는 공포로 변해갔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누가 보면 조각상이라도 되는 양,
동작 하나 없이 가만히,
그저 위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발끝 근처에 고여 있는 빗물이 조용히 출렁였다.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비껴갔고,
누구도 그 자리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거기에 없기라도 한 것처럼.
이재우는 어제와는 달리 걸음을 멈췄다.
그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인도 한쪽에 서서,
숨을 쉬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눈동자만 이재우를 향해 돌아왔다.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커다랗거나 선명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이재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재우를 기다렸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와 동시에, 빗속 공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차가운 쇳내가 스멀스멀 코끝을 찔렀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 안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귓속 깊은 곳에서 바닷속처럼 먹먹한 압력이 차올랐고, 목덜미를 타고 서릿발 같은 한기가 내려앉았다. 이재우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쿠르르르릉
이번엔 훨씬 더 가까이에서,
훨씬 더 낮고 길게 울렸다.
마치 구름 아래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몸을 뒤집는 소리처럼.
그녀의 상체가 흐려졌다.
머리부터, 천천히, 마치 물감이 번지듯.
가장자리부터 허물어져가는 것처럼,
그녀의 머리가, 몸통이, 허벅지가,
천천히,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쳤고,
우산과 구두의 소리는 변함없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몇 초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작은 운동화 한 켤레와, 잘린 발목 일부뿐.
깨끗하게 남겨진 그것은
핏자국도 없이
고요히 빗물 위에 잠겨 있었다.
이재우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착각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녀는 사라졌고, 그것은 이재우를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작은 숨결 하나,
“..... 봤지?”
혼잣말처럼.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 빗소리에 묻혔고,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구름 사이를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희뿌연 형체, 느릿한 곡선,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그 순간, 이재우의 시야는 한없이 좁아졌다. 그 형체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무언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름 틈 사이에서 번쩍이는 눈과, 살갗을 스치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그의 온몸을 덮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고, 손끝과 발끝이 얼어붙었다. 숨이 목구멍에서 걸려 나가지 않았고, 눈앞의 세계가 비틀리며 그를 집어삼키려는 듯 다가왔다.
이재우는 자신이 결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 하루, 그는 직장에서도 멍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작업 지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동료의 말소리마저 먼 울림처럼 들렸다. 퇴근 후에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날 밤 역시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귀 속에서는 여전히 낮고 깊은 울림이 맴돌았고, 눈을 감으면 구름 사이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그 눈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도 심장의 박동은 가라앉지 않았고, 온몸에 남은 차가운 기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이재우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어제 일은 잘못 본 걸 거야.”
그는 그렇게 중얼이며 출근길에 올랐다.
불안한 마음에 하늘을 보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우산 손잡이를 꼭 쥔 채,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빗방울이 신발에 스며들고, 물웅덩이가 바지를 적셨다.
습기와 매연이 뒤섞인 공기가 코를 막았지만, 그는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에서 어제의 장면이 희미하게 다시 떠올랐고, 두근거림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가 남자와 여자가 서 있었던 자리 근처를 지날 때,
옆 골목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의 우산을 낚아채 날려버렸다.
비에 젖은 우산은 도로를 구르며 멀어졌다.
“안 돼...”
이재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시야가 열리며 회색 구름 사이가 드러났다.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
뱀과도 비슷하지만, 훨씬 더 이질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형체였다.
비늘처럼 보이는 표면은 비에 젖어 번들거렸고, 그 사이로 희생자들의 마지막 숨결이 얼음처럼 스며든 듯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몸체가 뒤틀릴 때마다 구름이 찢겨나가고, 하늘의 절반이 그 존재로 뒤덮였다.
그 진동은 살아 있는 짐승의 숨소리 같으면서도, 굶주림에 떨리는 무언가의 울림이었다.
공기는 묵직하게 짓눌렸고,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그 눈동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재우를 향해 돌아왔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온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며 심장이 얼음물에 잠긴 듯 차갑게 조여왔다.
허벅지와 종아리는 돌덩이처럼 굳어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했고, 온몸의 혈관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시선은 강제로 고정된 듯 떼어지지 않았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귀 안쪽에서 쿵쿵거렸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진 채 극한의 공포만이 자리했고, 그 압박에 입술은 스스로를 배반하듯 제멋대로 움직였다.
“살려줘... 살려줘...”
그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마지막 순간에 내뱉던 바로 그 말이었다.
하늘 속의 그것은 이재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느렸지만, 압도적인 무게가 있었다.
빗줄기는 그 몸을 타고 떨어져, 마치 하늘 전체가 흘리는 눈물 같았다.
그것의 입가가 아주 조금 벌어지며, 길고 축축한 혀가 구름 속을 헤집었다.
이재우의 호흡이 가빠졌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 어딘가에 미약하게 일렁였지만, 다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인형처럼 그 자리에 고정돼 있었다.
귀가 멍해질 정도로 빗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그 안에 섞여 있는 소리를 그는 알아들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목소리가 겹쳐 속삭이고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그것은 절규이자 포기였고, 경고이자 초대였다.
그림자가 이재우 위로 드리워지고, 발목 주변에서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기어올랐다.
시야 가장자리가 어둠에 잠기며, 온 세상이 천천히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구름 속에서 번쩍이는 눈과 함께 허공을 갈라놓을 듯 길고 낮게 울려 퍼진 쿠르르릉 소리였다.
비가 그치지 않는 도로 위에, 잠시 후 남은 것은 낡은 우산 하나뿐이었다.
천은 갈라져 물결처럼 나풀거렸고, 빗방울이 손잡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우산의 금속대에는 아직도 이재우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 미약한 열이 맴돌았지만, 그 열마저 빗물 속에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리고 주변은, 너무도 조용했다.
바람 소리마저 끊기고, 남은 것은 하늘 위 깊은 어둠 속에서 아직도 희미하게 맴도는 쿠르르릉 거리는 소리의 잔향뿐이었다.
이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며,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단체는 실제와 무관합니다.
혹여 현실과 유사하더라도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비 오는 출근길, 길을 걷다 문득 건물 처마에서 물이라도 떨어지는지 하늘을 자꾸 올려다보는 한 사람을 보고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고, '만약 비 오는 날 하늘에서 들려오는 쿠르르릉거리는 울림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생명체가 구름뒤에서 내는 소리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더해 쓰게 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