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 처음에는 부끄러운 병원이었다. 장애라고 불릴 정도의 정신질환을 지닌 사람이 아닌 이상, 우울한 사람이라던가, 아무튼 뭔가 내면이 불안정한 사람들이 이곳에 방문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음의 병은 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무언가다. 이건 병원에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약으로 치료한다니 말도 안 돼. 무엇보다 나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의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와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공유하지 않은, 생판 처음 보는 타인에게 나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라고? 남들에게 하지 못한 말을 털어내라고? 그것도 돈을 내고? 미친 짓이야‘
하지만 나는 납득했다. 아니 납득당했다. 아무튼 병원은 병원이고, 아무튼 그들은 전문가다. 아무리 부정한들, (표현이 부정확하지만) 그들은 나보다 ’한 수 위‘ 였다. 아주 좋아졌달까, 본래의 목적은 완치되었다. 이후로 나는 그저 한 달에 한 번, 고민과 걱정을 털어낸다는 느낌으로 이곳을 다니고 있다. 물론 아직 나는 불편한 편견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심적 편안함을 의도한 인테리어’
이걸 지각하는 순간 이는 더 이상 나에게 ‘심적 편안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의도되었다는 이미지는 가식적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져서, 이런 인테리어는 나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조용한 피아노가 흘러나온다. 이것도 역시 가식적이다. 대중가요가 나온다면 가식적이라는 이미지가 사라졌을까? 대중가요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상상을 해본다. 조금 웃길지도.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담당 의사가 웃으며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웃음으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로 들어갔다. 상담실에 들어가 착석하면 형식적으로,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있다. “약의 효과는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입맛은 어때요?” (좀 떨어지지만, 덕분에 살이 빠졌어요) “저번에 말한 부작용 같은 건?” (마그네슘 영양제를 먹었더니 괜찮아졌어요). 절차대로 대화가 이루어지면 다음은 나의 일상생활에 관한 질문이다.
”요즘 고민이라던가 힘든 건 없나요? “
왜일까. 평소와 다르지 않은 질문인데. ‘괜찮아요’ 라던가 시험기간, 공부법에 관한 이야기나 나누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뇌까지 도달한 ‘힘든 거’라는 담당의의 말에 나의 뇌세포는 강한 반응을 보였다. 힘들다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기라도 한 건지, 나는 지난 1년간의 친구들과의 추억, 선생님과의 추억, 엄마랑 싸운 일, 오늘 겪은 친구들과의 이별,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의— 뇌가 출력한 ‘힘든 거’에 해당하는 기억들은 하나같이 다양한 감정들의 혼합물이었다. 그렇게 출력된 기억과 걱정은 나에게 눈물을 유도했다. 인체란 참 기계적이구나, 난 생각했다. ‘힘든 거’의 뜻을 잘못 인지한 결과로 이런 사태가 일어났으니, 이것은 신체의 명백한 오작동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각종 책에서의 주인공들은 정신적인 무너짐으로 인해 우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런 주인공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마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친구나 선생님이라면 모를까, 정신과의 전문의 앞에서 라니, 안 될 일이다. 이건 아마도 아직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돈을 받고 나의 어두운 내면을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남아있기에 나타난, 나의 작은 고집이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당시의 감정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담당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실한 건 내 붉어진 눈시울은 눈치챘으리라. 묵언수행이라는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딱히 없는데요, 를 표현하고 있는 나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나는 침묵을 싫어한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침묵은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다. 저 의사는 다 알고 있겠지, 아무리 아닌 척을 한들. 저 사람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 침묵도 다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불편한 건 없었다. 나 같은 환자(?)가 한둘이겠는가.
이후의 대화는 평범하게 흘러갔다.
“이제 고3인데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그냥…3월 모의고사 생각밖에 들지 않네요”
하하, 웃으며 그는 3모가 전부는 아니니까,라고 말씀하셨다. 젊으시니까 내 기분을 어느 정도는 공감해 주실 줄 알았는데. 자기는 다 끝났다 이건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나도 그런 반응을 보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뭐,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 결국엔 수능이 전부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3모가 전부처럼 느껴진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새로운 반도 생기겠네요. “
“아, 그거 말인데 “
나는 조금 들떠서 말했다.
“꽤 똑똑한 애들하고 같은 반이 된 것 같아서 좀 좋은 것 같아요.”
들은 것으로만 판단하건대 우리 반은 아주 우수한 친구들이 모이는 느낌이 강한 반이었다. 기대되기도 하고, 나도 그 우수한 축에 끼고 싶어 미치겠다. 목표가 생기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 이야기를 그에게 했다. 사실 그에게 아쉬운 점은 공부에 관한 조언이 좀처럼 없으시다는 점이다. 그 전의 담당의는 공부멘토처럼 조언도 해주시고 그랬었는데, 다른 병원으로 이동하셔서 다시 보지는 못한다.
“동기부여도 되고 좋겠네요!”
“네… 정말로”
왜인지 나는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병원을 나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여동생이 나를 반겨줬고,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
나는 철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걸 의식하는 시점에서 나는 철이 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언제쯤 철이 들까? 아마 평생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방을 꺼내 롤링페이퍼를 읽어본다. 한 명 한 명의 메시지를 읽어본다. 생일축하 메시지보다는 나와의 추억과 미래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진짜 행복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진짜, 진짜 행복한 고2였다. 학창 시절의 정점. 친구들과의 좋았던 기억들.
그런가 하면 고3의 걱정도 피할 수는 없다. 담임은 좋은 분이실까. 선택과목 선생님은 누가 되실까. 수학 어떡하지. 친구들은 괜찮을까.
진짜 잘 지내보자고, 내 머릿속의 상상 속 3학년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3학년이니까. 진짜 중요하니까. 재수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