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등만을 바라보며 걸어야 했다.
얼굴은 볼 수 없었고,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넓은 등은 나를 앞에서 이끌었지만, 동시에 내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등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한 걸음 뒤따라야 했고, 그 그림자 속에서 세상을 조금씩 배워나가야 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커졌다.
그 넓은 등이 좁게 느껴질 때, 나는 그의 등을 벗어나 햇살 아래로 나왔다.
처음 맞이한 세상은 눈부셨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청명한 공기, 살갗을 스치는 따스한 햇살.
모든 게 새로웠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유가 느껴졌다.
그의 등은 나에게 두려움뿐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그 등이 무서워서 이런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다니, 나는 참 아둔했었구나.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햇살은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은 내 살을 태우듯 뜨겁게 내려앉았다.
비바람은 모진 채찍처럼 내 몸을 때렸고, 어둠은 나를 흔들어댔다.
나는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야했다.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이 찢어졌으며 얼굴에는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 고통 속에서 나는 세상의 냉혹함을 처음으로 알았다.
괴로웠다.
그 모든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힘겨웠다.
그때마다 떠오른 것은 언제나 ‘그의 등’이었다.
두렵다고 느꼈던 그 등이, 이제는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나 대신 고통을 막아주던 듯한 그 등, 늘 앞에서 묵묵히 걸어가던 그 등이 보고 싶었다.
아니, 이제는 얼굴을, 그 표정을, 등의 주인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거운 다리를 다시 내디뎠다.
상처 입은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몸을 찔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바람 속에서 몸이 휘청거려도,
타오르는 햇살이 살을 태워도,
나는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터질 듯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단 하나의 외침만이 울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의 앞에 섰다.
늘 등만 보아왔던 그를, 지금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때때로 뒤를 돌아보며 미소짓던 그 얼굴.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바로 그 얼굴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은 햇살에 그을려 붉게 타올라 있었고,
깊게 팬 주름마다 비바람이 새겨놓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 몸이 타오르고 상처입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얼굴은 나보다 훨씬 더 상처투성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두려워했던 등은 사실 고통을 막아주던 방패였음을.
내가 안도했던 온기는, 나를 대신해 모든 고통을 받아내던 그의 따스함이었음을.
그가 입을 열었다.
거친 숨결이 묻어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한없는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아들아, 뜨겁단다. 견디기 힘들 때면 언제든 내 뒤에 서렴...”
그제야 확실히 알았다.
무섭던 등, 낯설던 등은 아버지의 등이었다.
나를 지키고, 나를 감싸고, 나를 키워온 아버지의 등이었다.
지금까지 내 앞을 막아섰던 것은 거대한 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막아내던 방패였다.
나는 그 방패의 주인 앞에서, 그가 그래왔던 것처럼 눈물을 삼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