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좌의 굴레
임금이 한 동네의 괴이한 소문을 들었다.
한 양반이 노비의 딸과 사랑에 빠져, 가문을 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이야기였다.
임금은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허허, 어리석도다. 첩으로 삼아도 될 일이며, 무리를 하면 측실로 들일 수도 있거늘.
어찌하여 가문을 내던지고 천한 계집 하나를 품겠다는 것이냐.”
그러나 그 말끝에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어찌하여? 무엇이 그리 대단하였기에?
임금은 결국 명을 내려 그 양반을 압송케 하였다.
끌려온 양반은 조정의 위엄 앞에서도 눈빛을 굽히지 않았다.
임금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대듯 물었다.
“그 노비의 딸, 미색이 뛰어나다 들었다. 허나 그 아름다움도 세월 지나면 빛을 잃는 법.
혹 글을 읽고 가락을 읊는다 하더냐? 그 또한 남 앞에서 잠시 반짝일 뿐.
마음이 곱다 하더냐? 천한 혈통의 덕행이 어찌 귀한 가문을 받쳐 세울수 있을꼬?
더구나 면천시켜 양인으로 만들고, 남의 집 양녀로 입적시켜 측실로 들이는 길도 있지 않느냐.
호적 한 줄 고치는 일, 권세 있는 가문이라면 짐의 눈마저 속일 수 있을 터인데...”
임금은 고개를 돌려 대신들을 훑으며 비웃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가문을 버렸다 하니, 저 사내의 고집을 보아라.
짐이 알기로는, 그대들 집안도 못할 일은 아닐 터인데 말이지.”
궁중은 싸늘히 굳어졌다. 그러자 양반은 목소리를 낮추되 단호히 답했다.
“전하, 노비의 딸은 이미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얼굴이옵니다.
그런 이를 억지로 양인으로 꾸며 측실로 들인다면, 세상에 나설 수 없고,
오직 집안 깊숙이 숨어 살아야 하옵니다.
그리되면 그녀는 새장안의 새가 되고, 날개 잃은 나비가 되고 맙니다.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이름조차 숨겨야 하는 삶이라면, 그것이 어찌 진실한 삶이겠사옵니까.
소인은 오직 한 사람과, 밝은 날 아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함께 숨 쉬고, 함께 늙어가고자 하였을 뿐이옵니다.
권세도, 명예도, 가문도 그 앞에서는 티끌이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대신들이 술렁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허망하다, 미친 사내로다.”
“노비의 딸이라니, 그 요괴 같은 것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
“천하의 대소사를 논해야 할 조정에서, 저리 정신나간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대신들은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붉혔고, 몇몇은 혀를 차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양반은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때 임금이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허허, 요괴라 하였느냐? 미친 사내라 하였느냐?
그러면 그대들 중 누가, 저 사내처럼 오직 하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지조를 지녔단 말이냐!
그가 천한 여인을 위하여도 저리 지조를 세웠거늘,
그대들은 짐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목숨 하나 바칠 마음이나 있는가!
사랑을 위해서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자도 있는데,
짐을 향한 충의라면 마땅히 그보다 더 굳건해야 하지 않겠느냐!!”
대신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누구도 감히 대꾸하지 못하였다.
임금은 손을 내저으며 물러가라 명했다.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러났다.
광대한 전각에 홀로 남은 왕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짐이 천하의 임금이라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있더냐.
정사 또한 충의 또한, 족히 한마디로 결단할 수 없어 사방의 눈치를 살피며 얽매여 사는 것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짐을 높다 하나, 실상은 왕의 옷을 입은 죄수와 다를 바 없도다.
그러나 저 사내는 가문을 버리고도 한 여인만을 좇았으니,
세상은 그를 어리석다 하나, 짐은 차라리 그 어리석음을 부러워한다.
짐은 단 한 번도, 저토록 하나를 향해 목숨과 세상을 버릴 용기를 지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랑 하나로 세상을 등지고, 속박을 벗어나 참된 삶을 누리니,
내가 새장안의 새이고 날개잃은 나비로구나.
실상 어좌의 주인은 짐이 아니요, 바로 저 사내이니라..."
휘황한 등불 아래 홀로 남은 왕의 그림자는, 누구보다 초라해 보였다.